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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서울 평양냉면에서 동치미 국물이 빠진 이유는?

[아무튼, 주말]

실향민들이 그리워하는

옛 평냉 맛을 재현하다


“냉면은 아무 맛이 없어. 그게 피양(평양)냉면이야.” 2020년 은퇴할 때까지 58년간 서울 ‘우래옥’ 카운터를 지킨 김지억(91) 전 전무가 자주 하던 말이다. 투명하도록 맑은 국물, 메밀 향이 슬쩍 올라오는 면발, 고기 몇 점과 삶은 달걀 외에는 별다른 꾸미(고명)가 없는 음식. 무미(無味)하달 정도로 심심하고 단순하기에 오히려 제대로 맛 내기 힘든 게 냉면이다.


그래서일까. 평양과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이북 출신 어르신들과 냉면을 먹다 보면 “어릴 적 고향에서 먹던 맛을 내는 데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옛날 이북에서 먹던 평양냉면은 어떤 맛이었을까. 요즘 남한의 냉면집들에서 파는 냉면과는 어떻게 다를까. 옥류관 등 오늘날 평양에 있는 냉면집들은 본래의 맛을 유지하고 있을까. ‘아무튼, 주말‘이 이 사건을 추적해 봤다. 1920~1930년대 신문 기사와 문헌을 토대로 분단되기 전 평양에서 먹던 냉면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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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문 기사를 참고해 재현한 옛 평양냉면. 소·돼지·닭으로 뽑은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섞고 국간장으로 간했다. '율평' 박성만 대표는 “이렇게 판매하고 싶지만 닭 육수는 하루만 지나도 맛이 변하고 일손이 필요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실향민들의 추억 속 냉면

“추운 겨울날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까지 모여서 안방에서 냉면을 먹었어요. 불을 때 방바닥은 뜨거운데 냉면 한 그릇 들이켜면 몸이 으슬으슬 떨려요. ‘춥다’고 하면 이불을 갖다가 씌워줘요. 그렇게 집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었어요.”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질 당시 일곱 살이던 김동건(86) 아나운서는 “네댓 살 때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다”면서도 어릴 적 냉면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어려서 집에서 먹던 냉면과 서울 냉면은 고명이 제일 다르단다. “우리 집에서는 반드시 꿩으로 했어요. 칼 두 개로 도마가 깨질 정도로 꿩을 뼈까지 다져야 돼요. 그걸 양념해서 동글동글하게 만들어 삶아요. 광주리에 펴놨다가 냉면에 넣어서 먹는 거예요.”


이북에서는 김 아나운서처럼 집에서 냉면을 즐겼다. 고당 조만식의 아들인 조연흥(84) 전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은 “집집마다 냉면 틀이 있어서 자주 냉면을 해 먹었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평양 옆에 있는 평안남도 강서군. 서울 유명 냉면집 중 하나인 ‘강서면옥’ 창업자도 여기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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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윤혜

김 아나운서는 “겨울에는 땅에 묻어둔 동치미를 냉면 육수로 먹기도 하고, 고기 국물을 끓여 육수를 만들기도 한 것 같다”고 했다. 세계김치연구소 박채린 책임연구원은 “무가 맛있는 겨울에는 동치미 국물을 주로 썼고, 여름엔 소·돼지·닭고기 등 고기 육수를 활용했다”고 했다. 부모가 모두 평안도 출신인 한식당 ‘콩두’ 한윤주 대표는 “어머니가 소고기 육수에 무를 많이 넣고 국물을 넉넉하게 잡아서 냉면용 김치를 따로 담갔다”고 했다.


당시 평양냉면 국수는 100% 메밀로만 뽑거나, 메밀 함량이 매우 높았다. 메밀로만 뽑은 국수를 ‘순면’이라 부른다. 김 아나운서는 이렇게 회상했다. “순면은 질기지 않고 아주 부드럽거든요. 그런데 반죽하기가 어려워요. 뜨거운 물로 반죽해야 돼요. 집에서 일하는 아저씨가 얼음물을 옆에 놓고 손을 담갔다가 반죽하기를 반복했어요. 손이 금방 시뻘게졌지요.”

◇ 서울 평냉 vs. 평양 평냉

지금은 북한 평양 냉면집보다 서울 냉면집 냉면이 옛 평양냉면 맛에 더 가깝다. 서울에 평양냉면이 자리 잡은 건 일제강점기. 1930년대 낙원동 평양냉면집에서는 갈비 한 대에 20전, 냉면 한 그릇에 20전을 받았다. 그 정도로 고급 음식으로 여겨졌다. 평양냉면은 해방 이후, 6·25 전후로 내려온 이북 출신들이 줄줄이 냉면집을 열며 대중화됐다.


오늘날 서울의 평양냉면이 분단 전 평양 냉면집들과 다른 건 동치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 ‘남포면옥’을 빼면 육수에 동치미를 섞는 집이 거의 없다. 우래옥처럼 100% 소고기 육수를 쓰거나, ‘을지면옥’ ‘필동면옥’처럼 소고기와 돼지고기 육수를 섞어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서울 냉면집들도 동치미 국물을 섞었다. 하지만 위생 관리가 힘들었다. ‘우래옥’에서 오래 일했고 ‘대원각’과 ’봉피양’ 냉면의 기틀을 잡은 고(故) 김태원 조리장은 “1980년대 말 냉면 육수에서 허용치 이상의 대장균이 발견되면서 동치미 국물 쓰는 집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김지억 전 전무는 “우래옥 냉면도 원래는 동치미도 섞었지만, 육수에서 대장균이 검출돼 영업정지 당한 뒤 동치미를 뺐다”고 했다. 고기 육수만 쓰는 냉면집이 대세가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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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옥류관'의 평양냉면. /조선일보DB

그렇다면 오늘날 북한의 평양냉면은 어떨까. 2016년 탈북한 태영호(62)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한국에 와서 그리운 것 중 하나가 평양냉면”이라며 “서울에 있는 유명하다는 냉면집은 거의 다 가봤는데 내가 생각하는 평양냉면은 없었다”고 했다. ‘진정한 평양냉면’ 맛의 비밀이 육수에 숨어 있다고. 핵심은 간장이다. “북한에서는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를 넣고 거품과 기름을 건져내면서 먼저 끓인 다음 고기가 익으면 건져냅니다. 이 육수에 무와 간장을 넣어 잠깐 더 끓여 무 맛과 간장 맛을 내요. 살림이 좀 넉넉한 집에서는 동치미 국물까지 섞습니다.”


그는 또 “서울 냉면과 평양 냉면의 차이는 ‘눈 맛’”이라고 했다. “평양냉면은 ‘꾸미’를 높이 쌓습니다. 삶은 계란과 함께 튀긴 계란·고추·파 등을 가늘게 썰어 배와 함께 올립니다. 먹기 전부터 눈 맛이 좋을 수밖에요. 고명으로 삶은 계란과 고기, 김치 몇 조각 올리는 한국의 평양냉면과는 달라요.”


태 사무처장이 북한 최고로 꼽는 냉면집은 평양 옥류관. 하지만 6·25 전 한국으로 내려온 실향민들에게 옥류관 냉면은 추억 속 냉면과 전혀 다르다. 김 아나운서는 “1985년 평양 방문 당시 옥류관 냉면을 먹어봤지만 질기고 맛이 전혀 아니었다”고 했다. 메밀과 전분(감자녹말) 비율이 4대6. 서울 냉면집들의 메밀 함량이 70~80%인 것에 비하면 질기고 메밀 향이 약할 수밖에 없다.


평양 옥류관 냉면은 빛깔이 전체적으로 검다. 특히 면발이 칡냉면처럼 검정에 가깝다. 북한 음식점 ‘동무밥상’ 윤종철씨는 “육수에는 간장을, 면 반죽에는 식소다를 타서 그렇다”고 했다. 윤씨는 4개월간 옥류관 주방에서 냉면 만드는 법을 배운 뒤 인민군 장성식당에서 10년간 일하다 1998년 탈북해 2015년부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식소다를 섞어 반죽하면 국수가 검어지지만 부드럽고 목 넘김이 좋습니다. 국물은 닭과 꿩으로 뽑은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고 간장으로 간해요.” 윤씨는 식당에서 내는 냉면에 식소다를 쓰지 않는다. “손님들이 건강에 민감해 식소다 넣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음식 작가 박정배씨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불린 북한의 경제·식량난이 평양냉면 변화의 원인”이라며 “중국인 입맛에 맞춰 쫄깃한 국수와 새콤달콤한 육수를 사용하는 중국 옌볜을 중심으로 한 조선족 냉면에 영향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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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신문 기사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분당 '율평'에서 재현한 옛 평양냉면.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옛 평양냉면 재현해 보니

실향민들이 먹었을, 남북 분단 전 평양의 냉면 맛을 경기도 분당에 있는 평양냉면집 ‘율평’에서 박 작가 등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재현해 보기로 했다.


율평 박성만(49) 대표는 소 양지 3kg·사태 2kg, 돼지 뒷다리 2kg, 토종닭 1kg 총육류 8kg에 생강·양파·대파를 넣고 육수 50L(100인분)를 우리고 국간장으로 간했다. 평양의 냉면집들을 소개한 1931년도 기사를 기본으로 했다. “냉면 국물로 소의 살코기와 비계 없는 돼지고기, 닭고기 또는 생치꿩고기도 넣고 물을 요량대로 붓고 푹 고아서 패내여 배전대에 넣고 꼭 짜서 사용함은 이 국물 맛이 제일 달고 좋습니다. 겨울이라도 동치미국 이외에 돼지국물에다가 국수를 차게 말아 먹는 수도 있습니다.”(1931년 12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과거 평양냉면집에서 팔던 냉면은 다양한 고기 육수를 섞었다. 소고기, 돼지고기와 함께 닭고기 또는 꿩고기 등 조류가 빠지지 않았다. 김 아나운서 등 이북 출신들이 냉면이라고 하면 꿩을 떠올리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분당에 본점이 있는 ‘능라도’는 김영철 대표가 1·4 후퇴 때 냉면 틀을 챙길 정도로 냉면을 사랑한 부친의 유품 중 발견한 냉면 레시피로 창업한 냉면집. 이 집 냉면 육수에도 노계(老鷄)가 들어간다. 요즘 서울 냉면집이 닭이나 꿩 육수를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박 대표는 “닭 육수는 단맛이 좋지만, 하루만 지나도 맛이 변해 사용하길 꺼린다”고 했다.


동치미는 여름이라 맛있는 무를 구할 수 없어서 시식을 통해 가장 뛰어난 시판 동치미 제품을 사용했다. 고기 육수와 동치미 국물은 박 대표가 여러 차례 실험한 끝에 찾아낸 7(육수)대3(동치미)이라는 최적의 비율로 섞었다.


냉면 국수는 100% 제주산 메밀로 뽑았다. 율평에서 사용하는 강원도 철원산 현무암 맷돌식 제분기로 갈았다. 과거에 이북에서도 제분할 때 맷돌을 사용했으리라 추측했다. 찰기를 위해 곱게 간 메밀가루와 식감을 위해 거칠게 간 메밀가루를 반씩 섞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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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평양냉면 재현에 사용한 제주산 메밀. 겉껍질을 벗기고 썼다.(왼쪽) 반죽기에서 뽑은 메밀 반죽. 밀가루나 전분을 섞지 않고 100% 메밀만으로 만들었다.(가운데) 냉면틀로 뽑은 면발.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갓 뽑은 면발을 놋그릇에 담고 국물을 부은 뒤 얇게 저민 소고기·돼지고기 편육과 찢은 닭고기를 올리고 달걀 지단을 얹었다. 삶은 달걀 반쪽도 띄웠다. 박 작가는 “과거 기록을 보면 고급스럽고 풍성해 보이도록 지단과 삶은 달걀을 함께 쓰는 냉면집이 많았다”고 했다. 태 사무처장 말마따나 평양냉면의 ‘눈 맛’이 한층 살아났다.


드디어 완성된 냉면이 눈앞에 놓였다. 육수부터 들이켰다. 제일 먼저 닭 육수가 느껴졌다. 닭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달다고 할 정도로 가벼운 감칠맛. 요즘 서울 냉면집 육수의 묵직함은 없었다. 육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뒤에는 동치미의 개운함이 남았다.


시식에 참가한 ‘평냉 마니아’ 직장인 이모(38)씨는 “다른 냉면집 육수는 단순하게 차가운 고기 국물이라면, 닭고기·돼지고기·소고기 등 육수와 동치미 국물이 층층이 쌓인 맛”이라고 했다. 박정배 작가는 “육수의 복합미와 면발의 메밀 향 조화가 뛰어나다”고 했다. 박찬우 ‘파브란트’ 총괄셰프(한국조리협회 상임이사)는 “산뜻하면서도 풍성한 냉면”이라고 평했다. 무미하기에 무한한 맛을 품은 평양냉면이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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