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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뽀얗고 통통한 굴이 품었네… 달고 시원한 겨울바다의 맛

[아무튼, 주말 - 정동현의 pick] 굴

조선일보

서울 석촌동 '대현굴국밥'의 굴국밥(앞)과 굴전./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고2 때 담임 선생님은 전설의 동물 해태처럼 눈이 부리부리하고 목소리가 걸걸했다. 장난기 많은 할아버지에 가까웠던 선생님이 입을 열면 시시껄렁한 농담과 잡담이 절반, 뼈를 때리는 조언이 또 절반이었다. 격의 없는 그 모습에 친구들끼리 “우리 담임 좀 멋있지 않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수능을 치고 친구들이 모여 선생님 댁을 찾았다. 우락부락한 선생님과 달리 다정다감한 사모님은 우리들 손을 하나하나 잡으며 반가워했다.


“학생들 먹여야 한다고 통영 아는 사람한테 고속버스로 오늘 아침 딴 굴을 받았다 아이가. 극성시러브라.” 사모님은 혀를 끌끌 차며 스티로폼 박스를 열었다. 상앗빛 굴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온돌방에 둘러앉아 돼지고기 수육과 굴, 김치를 양껏 먹었다. 굴의 토실한 살은 우유 같은 단맛이 돌았다. 우리는 허겁지겁 굴을 다 먹어 치웠다. 스티로폼 박스 바닥이 보였을 때 선생님이 한마디 했다. “짜슥들, 잘 묵네. 더 없나?”


날이 차가워지면 두꺼운 외투를 꺼내듯 자연히 굴 생각이 난다. 열아홉 살 겨울에 먹었던 굴보쌈 생각도 자연히 이어진다. 그때 맛이 정확히 기억날 리 없다. 그럼에도 그 정취를 가장 비슷하게 느끼고자 한다면 서울 마포 ‘미로식당’에 가는 것이 좋다. 굴보쌈 파는 집은 한반도에 차고 넘치지만, 최상급의 굴보쌈은 이 집에서 맛볼 수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호텔 출신 주인장은 모든 음식을 주문이 들어오면 만들기 시작한다. 칼질 한 땀 한 땀에 결기가 서렸고, 그렇게 만든 음식은 날과 각이 서 있어 입에서 노는 감각도 남다르다. 한 가지 문제라면 언덕길에 있어 가기 어렵고 늘 붐벼 자리 잡기 힘들다는 것뿐이다.


겨울이면 예약 주문을 받는 굴보쌈은 충분히 그럴 수고를 들일 만했다. 반짝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말갛게 빛나는 굴은 기본이었다. 따로 준비된 오겹살과 가브리살 수육은 부드러운 지방의 식감과 육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조합이었다. 서산에서 올라온 강굴은 서해안 자연산 굴 특유의 잘은 알이 특징이었다. 작은 크기만큼 맛의 밀도가 남달랐다. 아삭한 배추와 시원한 무생채, 굴, 돼지고기의 조합을 먹으며 한국인이라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대문으로 자리를 옮기면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지하에 ‘희양양’이라는 중국집이 있다. 명동에 자리한 무수한 화교 식당 중 하나인 이곳은 중앙우체국 주변의 허름한 정취와는 달리 조금 더 세련된 외양을 가지고 있다. 테이블에 올라온 김치부터 말끔하게 각을 잡아놨다. 근래 한정식집에 가도 제대로 김치를 내놓는 곳이 드물다. 기대감이 조금씩 끌어 올라왔다.


숙주를 올린 굴짬뽕은 배추에서 우러나온 달큼하고 시원한 기운이 굴을 만나 극대화되었다. 굴을 살짝 터뜨리듯 볶아 탁한 국물은 마실수록 어지러운 속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쌀가루를 넣은 반죽으로 뽑았다는 면은 뽀얗고 부드러웠다. 굴튀김은 반죽을 입혀 빠르게 튀겨냈다. 얇고 바삭하며 날렵한 튀김옷은 최소한의 조리로 맛을 이끌어내는 소박하지만 정확한 기술이었다. 튀김옷 안에서 증기로 익혀진 굴은 본래 가지고 있던 맛과 향을 잃지 않았다. 먹을 때마다 겨울 바다의 짠내와 저 깊은 곳에 숨겨진 단맛까지 모두 다가오는 듯했다.


송파로 가면 ‘대현굴국밥’이 있다. 석촌고분역 근처에 있는 이 집은 초록색 바탕에 궁서체로 쓴 흰 글씨의 간판이 커다랗게 달려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주변에서 몰려온 단골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그들은 메뉴도 보지 않은 채 주문을 척척 내놓았다. 일가족이 운영하는 이곳은 그 주문들을 익숙하게 받아 넘겼다.


피부가 얼어버릴 것 같은 날이었다. 굴국밥은 그 추위에 대항할 음식이었다. 미역과 부추, 굴에 달걀 하나를 깨 넣은 뽀얀 국물은 다정한 이웃 같았다. 순한 맛이 먼저 입에 닿았고 그 뒤로 칼칼한 기운도 느껴졌다. 식당 여기저기서 “아!” 하고 탄성이 들렸다. 날치알을 넣은 일종의 비빔밥인 굴밥은 자잘하게 씹히는 날치알과 큰 씨알의 굴이 재미난 대조를 이뤘다. 노란 달걀물을 입혀 지진 굴전은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진 듯 신선한 내음이 환하게 펼쳐졌다.


어린 제자들을 위해 통영에서 굴을 받아오던 선생님이 전해주고 싶었던 것도 그런 맛이었을 게다. 무엇이든 최고를 주고 싶은 마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이려던 그 마음은 철이 덜 든 열아홉 살 제자들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건강하실까? 그때 친구들은 잘 살고 있을까? 이제 새로운 한 해가 온다는 기대감보다 지나간 시간의 그리움이 더 쌓여가는 나이가 되었다.


#미로식당: 해물부추전 1만7000원, 굴보쌈 3만원, 주꾸미볶음 2만2000원. (0507)1412-3777


# 희양양: 굴짬뽕 1만1000원, 굴튀김(소) 2만3000원, 우동·울면 각 7500원. (02)3789-1688


# 대현굴국밥: 굴밥 1만1000원, 굴국밥 9000원, 굴전 1만8000원, 굴전 1만8000원. (02)413-7062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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