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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by 조선일보

너물비빔밥 먹을까, 볼락매운탕 맛볼까… 이 항구의 겨울은 왜 이리 맛나고 풍성할까

[아무튼, 주말] 음식고수 이상희와 떠난 산해진미 통영바다 여행

[아무튼, 주말] 음식고수 이상희와 떠난

산해진미 통영바다 여행



“통영 바다는 실망할 때가 없어요. 맑으면 맑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꽃 피는 봄은 봄대로, 무더운 여름은 여름대로 언제나 아름답죠. 하지만 통영 바다가 가장 맛있어지는 건 한겨울이에요. 찬 바람 도는 1월이면 대구, 물메기, 아귀, 미역, 김, 파래 등 맛의 풍성함이 절정에 이르지요.”


요리사 겸 사진작가 이상희(58)씨는 경남 통영 음식 전문가로 꼽힌다. 통영음식문화연구소를 세워 지역 전통음식 연구와 보존에 힘써왔고, ‘통영은 맛있다’와 ‘통영백미’ 등 책 2권을 펴내기도 했다. 서울 ‘요정’에서 일하던 그가 통영에 처음 온 건 1984년. “’충무’라고 불리던 38년 전이네요. 음식 배우면서 전국을 다닐 때였어요. 그 뒤 통영 토박이인 아내를 만나 정착하게 됐죠.”


40년 가까이 시장과 섬 구석구석을 다니며 통영의 맛을 기록하고 촬영해온 그에게 통영의 겨울 진미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는 “강구안에서 만나자”고 했다.


◇통영 부자들 먹던 귀한 음식 통대구


푸른 바닷물이 정오의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찰랑댔다. 육지로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온 강구안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평온했다. 왜 이곳이 천혜의 항구이자 오늘날 해군본부에 해당하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 잡게 됐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상희씨는 “강구안은 통영 사람들에겐 엄마의 자궁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통영 사람들 정서 깊숙이 자리 잡은 곳이죠. 강구안을 보며 일생을 사니까요.”


강구안 앞 항남동에 있는 이씨 연구소로 향했다. 그가 ‘통대구’라는 특별한 통영 음식을 맛보여주겠다고 했다. 12~3월 산란기를 맞아 살이 통통하게 오른 대구로 끓이는 ‘대구탕’은 통영의 겨울 별미. “맑고 담백하면서도 속이 확 풀릴 만큼 시원한 맛이 일품이죠. 끓이는 법도 어렵지 않아요. 냄비에 물 붓고 무와 청양고추, 다시마를 넣어 센 불로 끓이다 대구 토막을 미나리와 다진 마늘, 파, 홍고추 넣고 한소끔 끓어오르면 바로 불 끄고 미나리를 올려 내면 돼요.”


통대구는 통영에서도 부잣집에서나 먹던 귀한 음식이다. “7kg이 넘는 거대한 대구를 누렁이라 해요. ‘바다의 소’란 뜻이죠. 커다란 대구의 배를 갈라서 민물에 씻은 뒤 춥고 볕 좋은 날을 골라 바람 잘 드는 곳에 달아놓고 말려요. 열흘 이상 말려야 제맛이 나요.” 이씨가 옥상에서 보름가량 말린 통대구를 썰었다. 물기가 빠져, 세계 최고의 생햄이라 칭송받는 스페인 하몽을 연상케 하는 찰진 식감으로 거듭났다. 게다가 말리는 과정에서 숙성된 감칠맛이 농후했다. 미나리·참깨·고추 등을 넣은 양념간장에 찍어 먹으니 기가 막혔다. 파는 식당이 없다니 아쉬웠다.


◇겨울철 통영 바다 별미, 물메기


한겨울 통영 바다의 또 다른 별미는 물메기다. 맑은국을 끓이면 비린내와 기름기가 없이 시원한 맛이라 아침 해장국으로 사랑받는다. 이씨는 “바닷바람에 꼬들꼬들하게 말려서 찜 요리를 해 먹기도 한다”고 했다. 흐물흐물한 물메기를 말릴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걸로 찜을 해 먹는다니! 이씨를 따라 ‘이중섭식당’(055-645-4151)에 갔다. 이중섭이 살았던 항남동에 있다는 점 말고는 화가와 특별한 인연은 없는 식당이다.


간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진하게 조린 ‘마른물메기찜’은 물메기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진득한 식감이었다. 이 식당은 물메기찜을 시키면 ‘통영 비빔밥’을 함께 준다. ‘통영 너물 비빔밥’이라고도 한다. 너물은 ‘나물’의 통영 말. 다른 지역처럼 기름에 볶지 않고 다진 해산물을 볶다가 함께 넣어서 볶거나, 멸장으로 무쳐서 감칠맛을 낸다. 대접에 먹기 좋게 총총 다진 시금치·미나리·콩나물·솎음배추·미역·톳·참파래 등을 담고 고추장 없이 밥을 비빈다. 구수한 두부탕수 국물을 넣어 촉촉하게 비벼 먹는 것이 특징이다.


이상희씨는 멍게 비빔밥을 유명하게 만든 주역이다. 몇 해 전 아내가 운영하는 멍게 전문 식당 ‘멍게가’(055-644-7774)에서 내놨다. 통영 주민들은 “집에서 간단하게 한 끼 해결하던 음식을 메뉴로 내놓다니, 팔리겠느냐”며 혀를 찼지만, 관광객들에게 폭발적 반응을 얻으며 통영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멸치젓을 거른 맑은 멸장과 다진 마늘, 깨로 가볍게 무친 멍게와 해초가 어우러지며 싱그러운 바다내음이 입안에 가득 차고, 오도독한 식감이 경쾌하다.


◇통영음식 기틀 다진 통제영


점심을 먹고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갔다. 300여 년간 경상·전라·충청 삼남(三南)의 수군을 지휘하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이 1593년 한산도에 설치했다가 1603년 현재 자리로 왔다. 이씨는 “통제영이 통영 음식의 틀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통제영은 수군 최고 수뇌부가 상주하는 곳으로 삼남 바닷가 70개 고을에서 통제사에게 특산품을 바쳤습니다. 통제영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진상 전 검수를 위해 통제영 내 주방에서 요리해 먹기도 했지요.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된 후 요리사들은 명문가로 영입되거나 음식점에 흡수돼 명맥을 이어갔고요.”


이씨가 통제영 중심 건물인 세병관 뒤 산등성이에 있는 후원으로 가보자 했다. “조금만 올라가면 되는데 관광객들은 거의 안 가더라고요.” 후원 맨 위 의두헌까지 가는 길은 짧지만 꽤 가팔랐다. “통제사가 이 정자에서 연회를 열기도 했는데요, 그러면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해 가마처럼 생긴 작은 수레에 실어서 여기까지 올렸지요.” 의두헌에 올라서니 통영 시내와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연회를 준비하는 이들이야 힘들었겠지만, 이곳에서 통제사와 손님들은 최고의 눈과 입 호사를 즐겼을 것이다.


◇활기 넘치는 통영장과 동피랑 벽화마을


통제영에서 내려와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까지 물건을 팔고 사는 이들로 북적댔다. 전통 5일장인 통영장 때문이었다. “2와 7이 들어가는 날 서는데, 오늘(2일)이 올해 첫 장이라 더 사람이 많은 것 같네요.” 바다뿐 아니라 육지에서 난 물건도 많았다. 한 아주머니가 “도산(면)에서 재배한 재래종 시금치인데 아주 맛있다”며 들어 보였다. 줄기가 성글고 굵고 긴 개량종과 달리, 짧고 가는 줄기가 뿌리 끝까지 암팡지게 빽빽했다. 이씨는 “재래시장에서도 보기 힘든 토종 식재료를 찾을 수 있는 게 5일장의 매력”이라고 했다.


중앙시장은 활어회를 사려는 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이씨가 시장통을 꼬불꼬불 헤쳐나갔다. ‘동피랑 가는 길’이라고 적힌 팻말이 보이는가 싶더니 좌판을 벌인 상인들 옆으로 좁고 가파른 골목이 보였다. ‘중앙시장4길’. 이씨는 “동피랑 올라가는 옛길”이라며 “다른 길들은 벽화로 뒤덮이며 많이 바뀌었지만 이 길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동피랑은 지금도 통영 서민들이 주로 사는 동네죠. 중앙시장이나 서호시장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지매·아재들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동피랑 꼭대기 동포루에 다 와갈 때쯤 ‘그림가게 그리다’란 가게가 나왔다. 주인 장명환씨는 대구 출신으로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8년여 전 통영에 정착해 동피랑 벽화를 그리기도 하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를 주저앉힌 통영의 매력은 뭘까. “너무 도회지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바다도 있고 산도 있는, 살수록 편한 곳이 통영 같습니다.” 장씨와 통영에서 미술 작업을 하는 이들이 그린 그림엽서, 통영 풍경 수첩 등이 인기란다.


◇통영만의 독특한 술문화 다찌


동피랑을 내려오니 어느새 저녁. 이씨가 다찌 전문 ‘대추나무집’(055-641-3877)으로 안내했다. 다찌는 제철 해산물을 한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통영 음식 문화, 더 정확하게는 술 문화다.


“오래전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일식집 주방장 앞 바에 앉아 추천 요리를 먹는 것을 다찌라고 불렀습니다. 차츰 좌식 술상 방식으로 변해 이어지다,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받지 않는 술집 문화를 ‘통영 다찌’라 부르게 됐죠. 다찌는 술을 팔지 않으면 이익을 내기 힘든 구조인데, 술은 마시지 않고 음식만 먹으러 오는 관광객이 많아져 원래 방식의 ‘온다찌’, 저렴하고 가짓수가 적은 ‘반다찌’, 요리만 나오는 ‘술 없는 다찌’ 등 다양한 방식이 생겨났어요.”


보통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해산물이 한 상 가득 나오고, 이어 메인 격으로 회와 해산물이 다시 한 상, 그리고 조림·탕·구이·식사로 마무리된다. “첫 상은 특별한 솜씨가 없어도 식재료가 싱싱하면 바로 차릴 수 있지만, 두 번째 상부터는 주인의 요리 솜씨가 드러나기 때문에 여기서 단골이 결정되지요.” 가격을 매기는 방식은 가게마다 다르다. 대추나무집의 경우 2인 기본 6만원에 술값은 별도로 받는다.


◇통영이 사랑하는 생선, 볼락


이튿날 아침 일찍 서호시장에서 이씨와 만났다. 볼락, 새조개, 미역, 파래, 우럭조개, 참돔 등 싱싱한 해산물로 넘쳐났다. 이씨가 “아침 식사로 진짜 졸복국을 먹자”며 시장 내 ‘복복식당’(055-643-2987)으로 안내했다. 이씨는 “통영 복국이라면 졸복국을 떠올리지만 진짜 졸복국을 먹어 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다. “진짜 졸복은 먹으면 입에 쩍쩍 달라붙고 소변 색이 노랗게 되지요. 졸복 수가 줄어 졸복만으로 복국 끓이기가 쉽지 않아요. 졸복국이라고 팔지만 대부분 복섬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복어로 끓입니다.”


복복식당 수족관에서 복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표범 무늬를 한 복어가 있죠? 이게 졸복입니다. 검은 등에 작고 하얀 점이 촘촘히 박혀있고 옆구리 지느러미 위에 검은 반점이 있는 놈 보이죠? 그게 복섬입니다.”


아쉽게도 복복식당은 이날 휴무. 이씨가 “통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 볼락으로 끓인 매운탕을 먹자”며 정량동 ‘한산섬식당’(055-642-8021)으로 갔다. 1976년 문 연 노포로 봄에는 도다리쑥국 등 제철 해산물을 국·회·구이·매운탕 등으로 낸다. 고추장을 넣지 않고 고춧가루·마늘·고추 등으로 맛을 낸 매운탕 국물이 텁텁하지 않고 칼칼했다. 볼락을 건져내 살을 발라 입에 넣었다. 씹지 않아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내리는 듯했다. “통영 사람들은 볼락을 구이로 가장 즐깁니다. 작은 볼락을 한 마리씩 통째로 입에 쏙 넣었다가 기가 막히게 가시만 발라내는 분들이 많아요(웃음).”


◇막걸리 빚는 건축가 부부


충무대교를 넘어 미륵도로 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꼽히는 산양관광도로를 지나 산양읍 야소골에 있는 ‘야소주반’(010-6588-1321)으로 갔다.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한 건축가 박준우씨와 아내 김은하씨가 귀촌해 운영하는 오마카세 레스토랑이지만 직접 빚은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가 서울에서도 화제다.


박씨는 “계절에 따라 콘크리트 배합 비율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이를 막걸리 빚기에 적용했다”며 “누룩, 쌀, 물, 환경 등을 달리하며 7년간 130여 회에 걸쳐 빚은 끝에 가장 맛있었던 32번째 레시피대로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인공 감미료를 전혀 첨가하지 않아 은근하고 자연스러운 단맛과 산미가 조화롭고, 탄산이 청량감을 더한다. 그 맛이 소문 나면서 이제는 구하기조차 힘든 ‘희귀템’이 됐다. 병당 2만7000원. 식당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5만·8만원 코스가 있다.


커피도 마실 겸 미륵도 영운리에 있는 ‘클라우드힐’(055-646-1414)로 갔다. 전형적인 ‘오션뷰(바다 전망)’ 카페. 통유리라 한려수도가 걸리는 것 없이 펼쳐졌다. 한산도, 죽도, 화도 등 섬들이 아침 안개 속에서 푸른빛으로 포개진 풍경이 한 폭의 수묵담채화였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 ‘오미사꿀빵’(055-646-3230)에 들러 통영 제일의 간식인 꿀빵을 챙겨 강구안으로 돌아왔다. 이씨가 “통영 최고 아이스크림집”이라 추천한 ‘카페바다봄’(055-648-0710)이 강구안 바로 앞에 있었다. 바삭한 프랑스 과자 랑그드샤로 만든 콘에 우유 아이스크림을 올려주는 ‘랑그드샤콘’과 소보로빵에 우유 아이스크림을 얹고 고소한 콩가루를 뿌린 ‘소콩소콩’을 주문해 3층으로 올라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강구안은 오늘도 찰랑찰랑 평온했다.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통영=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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