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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위스키는 없어요, 좋은 위스키와 더 좋은 위스키만 있을 뿐”

[아무튼, 주말]

스코틀랜드의 한국인 위스키메이커 이세기


라세이(Raasay)는 영국 스코틀랜드 서쪽 대서양에 있는 외딴섬이다. 면적은 62.31㎢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만 하지만, 인구는 192명(2001년 기준)으로 분당의 아파트 한 동보다 적다. 이세기(38)씨는 이 작고 외진 섬에서 위스키메이커로 일하고 있다. 위스키 본고장 스코틀랜드 유일한 한국인 위스키메이커.


그는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싶어서 직업을 세 번 바꿨다. 국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일하다 우연히 알게 된 크래프트(수제) 맥주 맛에 반했다. 맥주를 직접 만들고 싶어진 이씨는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가 맥주 양조사가 됐다.


그러다 위스키메이커가 된 것은 아내 덕분이다. 아내가 해외 출장길에 사다 준 싱글몰트 위스키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직접 만들고 싶어서 멀리 스코틀랜드에서도 배를 25분 더 타야 닿는 섬 라세이까지 갔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주류 박람회에서 자신이 만드는 위스키를 소개하고자 방한한 이씨는 “기회가 된다면 스코틀랜드 최초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위스키 양조장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라세이 디스틸러리’ 위스키메이커 이세기씨는 “스코틀랜드에서 내 브랜드로 위스키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영업사원에서 맥주 양조사, 다시 위스키메이커

-위스키메이커는 무슨 일을 하나요?


“제 직함이 정확하게는 ‘QA디스틸러(Quality Assurance Distiller)’입니다. 증류(distill)만 맡고 있는 건 아니고, 위스키의 주원료인 보리를 발아시킨 몰트(맥아)를 당화·발효·증류하고 오크통에 숙성해 병에 담는 최종 과정까지 모두 책임지고 있습니다. 증류만 하고 숙성과 병입은 다른 곳에서 이뤄지는 양조장도 많은데요, 제가 일하는 ‘라세이 디스틸러리’는 위스키 생산의 모든 과정이 한곳에서 이뤄집니다.”


-위스키는 꽤 마셔봤지만 ‘라세이 싱글몰트 위스키’는 처음 들어봅니다.


“7년 전인 2017년에 문을 연 신생 위스키 업체입니다. 직원은 58명이고요. 저희 양조장은 작고 역사가 짧지만, 라세이는 과거 위스키 밀주(密酒)의 성지였어요.”


-위스키를 만들기 전에는 맥주를 만들었다고요?


“제주도에서 맥주 양조사로 일했습니다.”


-대학에서 식품가공이나 양조 관련 공부를 했나요?


“전공은 경영학입니다. 첫 직장은 식품회사 영업 담당이었어요. 국내외 출장 다니면서 우연히 맛본 수제 맥주에 빠졌죠. 그냥 마시기만 해도 되는데, 만드는 데 관심이 생기더라고요(웃음). 집에서 맥주를 빚다 보니 상업 양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제주맥주에서 양조사 모집 공고가 났을 때 지원했고, 운 좋게 입사했습니다. 4년 조금 넘게 맥주 양조사로 일했습니다.”


-위스키 양조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스카치 위스키 업체와 협업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위스키 담아뒀던 오크통에 맥주를 숙성시키면 독특한 맛이 나는데요, 그때 숙성이 술맛에 미치는 변화에 매료됐어요. 국내 한 위스키 브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양조 연수를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에 합격해 2021년 8월부터 2022년 8월까지 1년간 위스키 양조를 배웠어요. 그리고 2023년 초 라세이에 입사했습니다.”


-맥주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데 아쉬움은 없나요.


“원료나 생산 공정에서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면 맥주건 위스키건 술 양조라는 점에서 같고 양조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그대입니다. 물론 맥주는 여전히 즐겨 마십니다(웃음).”

◇ 배·열차·버스·비행기로 2박3일… 한국 오는 게 제일 힘들어

-라세이 섬에서 유일한 동양인인데 살기 힘들지 않나요?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친절하기로 이름난 지역인데, 라세이 사람들은 특히 더 친절해요. 전혀 배타적이지 않아요. 이웃으로서, 동료로서 저한테 너무 잘해줘요.”


-그곳에 살면서 제일 힘든 점이라면.


“한국 오는 거요(웃음). 2박3일이 걸립니다. 라세이에서 페리 선박을 타고 스카이(Skye)라는 큰 섬에 가야 하고, 여기서 버스로 기차역까지 갑니다. 스카이는 다리로 스코틀랜드 본토와 연결돼 있어요. 기차를 타고 인버네스라는 도시로 가서 하룻밤 자고, 다시 버스를 1시간가량 타고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1시간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갑니다.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해 12시간 비행하면 드디어 인천공항 도착이지요.”


-한국에 오면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뭔가요?


“라세이가 어딨냐? 한국까지 얼마나 걸리냐?”


-라세이 사람들은 뭘 제일 많이 묻나요?


“가족은 어딨냐고요. 아내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아기를 키우고 있어요.”


-독박 육아를 하고 계시군요.


“이렇게 한국에 왔을 때 잘해야죠(웃음). 곧 라세이로 데려가 온 가족이 함께 살려고 합니다.”


-위스키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아내라고요?


“아내가 미국 출장을 갔다가 싱글몰트 위스키를 사와서 처음 맛봤어요. ‘이런 위스키가 있네?’ 싶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블렌디드 위스키만 알았거든요.”


-그래서 이 모든 사건이 벌어진 셈인데, 그때 위스키 사온 걸 아내가 후회하진 않나요?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제주도 가서 맥주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도 ‘해보고 싶으면 해보라’고 지지해줬어요. 혼자 제주도에서 일하면서 주말 부부로 4년 넘게 지냈죠. 그때는 아이가 없었지만요. 위스키 배우러 스코틀랜드 간다고 했을 때도 아내는 응원해줬어요. 평생 감사해야죠.”

‘라세이 싱글몰트 위스키’는 6가지 자체 생산한 싱글몰트 원액을 섞어 만든다. 은은한 피트(peat)향이 인상적이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 입문은 블렌디드, 취향은 싱글몰트로 찾길

-싱글몰트 위스키, 요즘 많이 듣는데 정확히 뭔가요?


“단일 증류소에서 옥수수·호밀·밀·귀리 등의 그레인(곡물)이 아닌, 몰트(맥아)만을 단식 증류기로 증류해 생산한 위스키를 말합니다. 블렌디드(blended) 위스키는 여러 증류소에서 몰트뿐 아니라 여러 그레인을 사용해 생산한 원액을 섞어 만든 위스키를 가리키고요.”


위스키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곡물로 만든다. 미국 버번 위스키는 옥수수를 주재료로 하고, 캐나다 위스키는 호밀(라이)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한 가지 곡물보다 여러 가지를 혼합해 위스키를 만든다.


-왜 싱글몰트가 최근 인기인가요?


“의식주에서 개성을 표출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양조장·브랜드에 따라 맛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자신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어 각광받는 것 같아요.”


-스코틀랜드 위스키 업계는 한국 시장을 어떻게 보나요?


“트렌디한 시장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양조장 기준으로 판매량이나 매출은 중국이나 일본, 대만보다 작아요. 하지만 아시아 다른 국가에 미치는 파급력은 크기 때문에 한국 시장을 꽤 중요하게 봅니다.”


-위스키메이커는 어떻게 위스키를 맛보나요?


“위스키를 비교·평가할 때는 도수를 20도로 맞춥니다. 미지근한 물을 타서 희석하지요. 이때 위스키 맛과 향이 가장 잘 느껴진다고 봅니다. 위스키 원액을 그대로 맛본 뒤 조금씩 물을 더해 가면서 풍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맛봐도 재미있지요.”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어떻게 위스키를 마시나요?


“니트(neat), 즉 위스키를 잔에 따라서 그대로 마시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위스키 본연의 맛과 향을 즐기려면 니트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시죠. 얼음을 넣은 ‘온더락(on the rock)’은 못 봤어요. 워낙 스코틀랜드가 으슬으슬 뼈 시리게 춥고, 몸을 데우려고 위스키를 마시는 경우가 많아 차갑게 온더락으로 마시진 않습니다. 맥주와 섞어 마시는 양폭은 전혀 못 봤고요(웃음).”


-위스키메이커로서 꿈이나 목표가 있다면.


“영국 IBD(양조증류연구소)가 공인하는 ‘마스터 디스틸러’가 되고 싶어요. 그런 다음 기회가 된다면 스코틀랜드에서 제 위스키 브랜드를 만들고 싶습니다.”


-입문자에게 권하는 위스키는.


“시작하는 사람에겐 블렌디드가 좋겠죠. 대중이 좋아할 수 있는 맛을 탐색하며 만들어 왔으니까요. 블렌디드로 입문해 여러 싱글몰트를 마셔보며 자신에게 맞는 위스키를 찾아가기를 권합니다.”


-좋은 위스키와 나쁜 위스키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나요.


“스코틀랜드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이 세상에 나쁜 위스키는 없다, 좋은 위스키와 더 좋은 위스키가 있을 뿐이다.’ 위스키는 기호나 취향이 반영되는 술입니다. 자기 입에 더 맞거나 덜 맞는 위스키가 있을 뿐, 나쁜 위스키는 없어요.”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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