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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으로 얼굴 가린 그녀… 1500년전 저승길은 화려했다

황남동 고분서 목걸이·반지 등 착장 모습 그대로 출토돼 화제


1500년 전 신라 귀족 여성의 저승길은 화려했다. 금동관을 얼굴에 덮은 그는 양쪽 귀에 금귀걸이를 걸고 금동신발을 신었다. 은허리띠엔 작은 은장도를 매달았고, 열 손가락마다 은반지를 꼈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온몸에 치장했던 금·은 장신구는 땅에 붙박인 채 세상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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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남동 120-2호분 조사에서 6세기 전반 제작된 장신구 일체가 출토됐다. 사진은 금동관과 금귀걸이, 금드리개, 구슬 목걸이의 노출 모습. /문화재청

지난 5월 금동신발 한 쌍이 출토됐던 경주 황남동 고분<본지 5월28일 자 A20면>에서 6세기 전반에 만든 장신구 일체가 출토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망자가 묻힐 때 착장한 상태 그대로다. 경주 지역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적석목곽묘)에서 관과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이 일괄 세트로 출토된 것은 1970년대 황남대총 이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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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관·귀걸이까지 1500년만에 깨어난 신라의 여인 - 1500년 전 신라 귀족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황남동 120-2호분에서 금동관 등 장신구 일체가 온전한 세트로 출토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망자가 착장한 상태 그대로다. 신라에서 관과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까지 일괄 세트로 출토된 것은 1970년대 황남대총 이후 처음이다. 사진 위부터 금동관, 금 귀걸이 한 쌍, 금동관 좌우에 길게 늘어뜨린 장식인 금드리개, 남색 구슬 목걸이가 노출된 모습. 오른쪽 그림은 망자가 묻힐 당시의 모습을 추정한 것. /문화재청

“금동관은 머리에 쓰지 않고 얼굴 덮어”

3일 오후 2시 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목소리가 유튜브를 타고 흘러나왔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열린 ‘온라인 현장 공개회’다. 문화재청은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의 하나로 조사 중인 경주 황남동 120-2호분에서 장신구 일체가 나왔다며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먼저 망자의 얼굴 쪽에서 나온 금동관이 주목된다. 금동관은 3단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장식 2개를 덧붙여 세운 형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금동관 아랫부분이 목걸이 윗부분과 겹쳐서 출토된 것으로 볼 때 머리에 쓴 게 아니라 얼굴을 가린 용도”라며 “둥근 금동관을 평평하게 눌러 접어 얼굴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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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신라 귀족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신발이 흙더미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다. /문화재청

은허리띠 양쪽 끝부분에선 4개씩 묶음을 이룬 은팔찌가, 오른팔 팔찌 표면에선 크기 1㎜ 내외의 노란색 구슬이 500점 넘게 출토됐다. 작은 구슬이 연결된 구슬팔찌를 은팔찌와 함께 끼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김권일 연구원은 “은반지는 오른손에서 5점, 왼손에서 1점이 나왔는데 아직 왼손 부분은 발굴이 진행 중”이라며 “열 손가락 모두 반지를 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6세기 신라 최고위 귀족 여성”

이 화려한 무덤의 주인은 누굴까. 조사단은 여성으로 봤다. ①허리에 큰 칼을 차는 대신 작은 은장도(손칼)가 매달려 있고 ②굵은 고리 귀걸이를 착용했으며 ③실을 감는 가락바퀴와 ④청동 다리미가 출토됐다는 점이 증거다. 이한상 교수는 “금관, 금허리띠보다 위계가 낮은 금동관, 은허리띠가 나왔기 때문에 왕족보다는 최고위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며 “왕족이라면 직계는 아니고 방계”라고 했다.


조사단은 또 “금동관의 중앙부에서 금동신발 뒤꿈치까지 길이가 176㎝인 것으로 보아 망자의 키는 170㎝ 내외로 추정된다”고 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신장을 추정하기엔 무리라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조사단은 “무덤 구덩이 길이가 6m에 불과한 소형분에서 이처럼 높은 위계의 장신구 일체가 나온 것이 놀랍다”며 “과학적 분석을 통해 추가 조사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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