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복 김선생]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칼국수 먹은 이유는?
칼국수의 역사와 지역별 특징
돌아가신 할머니는 매년 여름 그것도 펄펄 끓는 가마솥처럼 무더운 한여름에 칼국수를 끓이셨습니다. 할머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든 칼국수를 온 가족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그릇씩 비웠지요. 왜 할머니는 연중 최고로 더울 때 칼국수를 끓이셨을까요.
서울 돈암동 '밀양손칼국수'의 하들하들한 면발. 돈암동에 있지만 성북동 칼국수집으로 분류된다. 식당 주인이 과거 국시집에서 일하다 독립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DB |
◇ 유둣날 대표 절식 칼국수
우리 조상들은 음력 6월 15일 유둣날을 명절로 지켰습니다. 유두(流頭)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줄임말. 맑은 시내나 폭포에서 몸을 씻고 햇과일과 유두면, 상화병, 수단, 건단 등을 먹으며 농사일로 지친 몸을 풀고 다가올 본격적인 무더위를 이겨내고자 한 명절이었습니다.
유둣날을 대표하는 음식인 유두면(流頭麵)은 갓 추수한 햇밀로 만들었습니다. 햇밀가루로 만든 국수에 닭고기를 넣었답니다. 닭 육수에 닭고기를 고명으로 얹은 제 할머니의 칼국수는 아마도 그 원형이 이 유두면일 듯하네요.
과거 국수를 만들기란 요즘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제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밀가루를 얻기부터 힘들었죠. 대청마루에 병풍을 펼쳐놓고 한지를 깐 다음 절구로 빻은 밀가루를 부채질해 날려 가루를 얻는 정성을 들였답니다. 그런 다음 반죽하고 밀고 육수를 내고 끓여서 내는 지난하고도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하죠. 오죽하면 칼국수를 ‘여자의 땀국’이라 불렀을까요.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칼국수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고 정성이었던 거죠. 올 여름에는 할머니를 기억하며 뜨거운 칼국수 한 그릇을 땀 뻘뻘 흘려가며 먹어야겠습니다. 기왕이면 유둣날이 좋겠죠. 올 유두는 양력 7월 24일입니다.
얇게 민 밀가루 반죽을 칼로 써는 모습. /조선일보DB |
◇ 1960년대 이후 대중 외식 발전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칼국수를 먹으며 더위를 식혔습니다. 칼국수란 한글 단어는 고려 말에 쓰인 중국어 학습서 ‘박통사’(朴通事)를 한글로 풀어 쓴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1677년)에 처음 나옵니다. ‘도면(刀麵)’ ‘절면(切麪)’ ‘칼싹두기’ ‘칼제비’로도 불렀습니다. 미식가로 유명했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칼국수(切麪)도 고기에 비길 만하다’고 예찬했지요. 칼국수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가장 오래된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1670년경)에는 칼로 썰어 만드는 국수로 녹두를 재료로 하는 국수 만드는 방법인 착면법(着麵法)과 밀가루로 국수를 만드는 별착면법(別着麵法)이 나옵니다.
과거 밀가루는 엄청 귀하고 비싼 음식이었습니다. 여름이 덥고 습한 한국에서는 평안도·황해도·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농사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지요.
밀가루가 흔해진 건 6·25전쟁 이후 미국이 무상 원조를 시작하면부터입니다. 여기에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분식장려운동을 펼칩니다. 일반 가정에서 즐겨 먹은 분식 즉 밀가루 음식은 칼국수였습니다. 이전에는 여러 재료로 만든 다양한 칼국수가 있었지만, 이때부터 밀 칼국수가 흔해지면서 ‘칼국수=밀로 만든 국수’로 각인됩니다. 이때부터 칼국수는 대중 외식으로 발전합니다.
안동식 칼국수는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은 반죽을 사용하는데, 밀가루로만 된 일반 칼국수 반죽보다 단단해 밀기 어렵다. 경북 안동 예미당 종가음식상설시연장 이정숙 반장은 “안동국시 만드는 과정 중 가장 힘든 게 바로 이 밀어서 펴는 일”이라고 했다. /조선일보DB |
◇ 서울-안동 ‘칼국수 커넥션’
서울 성북동 일대에는 유난히 칼국수집이 많습니다. 칼국수 면발이 얇고 가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이는 지역 칼국숫집들의 뿌리가 경북 그 중에서도 안동임을 알 수 있지요. 안동에서 국수 문화가 발달한 건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때문입니다. 유서 깊은 종가가 수두룩한 안동에서는 집집마다 제사가 많았고, 자연 집을 찾는 손님들로 북적댔습니다. 조상과 손님을 잘 모시기 위해 국수를 대접했습니다.
안동국수는 건진국수와 누름국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건진국수는 면을 삶아 찬물에 헹궈 대바구니에 건져놨다가 시원한 국물에 다시 말아 낸다고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누름국수는 다른 지역 칼국수처럼 면을 삶은 육수에 그대로 말아서 내는 제물국수죠. 콩가루를 섞는 건 안동국수의 특징입니다. 계절이나 날씨, 습도에 따라 다르지만, 밀가루와 콩가루를 2대1~3대1 정도로 섞습니다. 안동에선 예부터 콩 농사를 많이 지었고, 그래서 무슨 음식이건 콩가루를 넣는다고 합니다.
1964년 문 연 안동 삼산동 ‘선미식당’은 안동에서 칼국수를 처음 메뉴로 내놓은 식당입니다. 면발은 얌전하고 멸치 국물은 투명하게 맑은 건진국수 스타일입니다. 안동에서 국수를 파는 식당은 대개 이곳처럼 건진국수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형태의 국수를 내놓습니다.
경북 안동 '선미식당' 칼국수조밥 상차림. /조선일보DB |
서울 성북동 칼국수집들의 좌장이랄 수 있는 ‘국시집’은 박정희 정부의 분식장려운동이 한창이던 1969년 개업했습니다. 이름부터 국수의 경상도 사투리인 국시인데다 수육과 삶은 문어, 생선전이라는 경상도 잔칫상의 전형적인 메뉴를 함께 판다는 점에서도 안동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혜화칼국수’ ‘손칼국수’ ‘명륜손칼국수’ ‘밀양손칼국수’ 등 일대에 있는 식당들은 비슷한 상차림을 갖추고 있습니다. 국시집에서 일하다가 독립하거나 다른 이에게 비법을 물려주면서 비슷한 가게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혜화칼국수가 생선전 대신 생선튀김과 석쇠에 물기 없이 구운 ‘바싹불고기’를 내는 등 집집마다 칼국수와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사이드 메뉴를 조금씩 다르게 해 개성을 살리고 있긴 합니다.
성북동 칼국숫집들은 면발이 가늘다는 점에서 안동식 칼국수와 같습니다. 하지만 콩가루는 섞지 않아요. 서울 사람들이 콩 풋내를 선호하지 않는데다, 콩가루를 섞으면 밀가루로만 반죽할 때보다 쫄깃한 맛이 떨어지기 때문일 겁니다. 국물도 안동이나 대구 등 경상도에서 칼국수에 흔히 쓰는 마른 멸치가 아니라 소 양지·사태와 사골을 섞어서 뽑습니다. 칼국수를 상품화하면서 고급·비싸다는 인식이 있는 소고기로 대체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 대전 ‘얼칼’ 속초·강릉 ‘장칼’
대전은 칼국수 외식 역사가 오래된 지역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를 대전의 유명 빵집 ‘성심당’ 김미진 이사에게 들었습니다. “6·25가 끝나고 미국이 구호물자로 원조한 밀가루가 교통 중심지 대전에서 전국으로 배분됐답니다. 그래서 대전에는 밀가루가 흔했고, 칼국수 등 분식을 즐기게 된 거죠. 성심당도 저희 시아버님께서 원조 밀가루 2포대로 대전역 앞에서 시작하셨지요.”
특징적인 칼국숫집으로 대원칼국수·신도칼국수·공주분식을 꼽습니다. 1958년 개업한 대선칼국수와 1961년 문 연 신도칼국수는 멸치 육수와 쫄깃한 면발 같은 오래된 칼국수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1975년 오픈한 공주분식은 ‘대전 칼국수는 공주분식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붉은 육수에 쑥갓을 얹은 ‘얼칼(얼큰한 칼국수)’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멸치 육수에 고춧가루를 넣어 붉은 색과 매운맛을 내고 후추와 참깨, 김 가루, 대파 등을 더해 맛을 완성합니다.
공주분식이 대박을 내자 주변에 칼국숫집이 속속 들어서면서 대흥동 칼국수 거리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재개발로 칼국수 거리는 흩어졌지만 주변에서 그 맛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전 '대원칼국수'의 비빔칼국수. /조선일보DB |
대구는 전국에서 밀가루 소비량이 가장 많은 ‘분식의 도시’입니다. 대구 칼국수는 면을 다른 지역보다 넓게 썰고 야들야들한 면발을 선호합니다. 꾸미로 청방배추가 들어가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죠. 멸치 육수와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은 야들야들한 면발, 백반상에 나올 정도의 반찬이 나오는 등 안동 칼국수의 영향이 상당히 보입니다. 1965년 문 연 왕근이칼국수 이후 서문시장 칼국수 골목이 형성돼 성업 중입니다.
강원도 동해안 일대는 장(醬)을 이용한 음식이 유독 많습니다. 속초와 강릉 일대에는 장을 이용한 장칼국수집이 흔합니다. 멸치 육수를 기본으로 고추장·된장·막장을 가게마다 다른 비율로 섞어 만든 국물은 진하고 구수하고 얼큰하지요. 가게에 따라 홍게·조개·오징어·새우 등 해산물을 다양하게 넣고, 감자·호박·파·김을 꾸미로 얹는 것이 이 지역 칼국숫집들의 공통점입니다.
◇ 대부도 ‘바지락칼국수’ 제주 ‘꿩메밀칼국수’
강원도 원주는 멸치 육수에 된장을 푼 장칼국수와 ‘칼만’(만두를 넣은 칼국수)이라는 독특한 칼국수 문화가 있습니다. 된장을 풀지만 짜지 않고 구수합니다. 거기에 들깨를 넣어 걸쭉하고 고소한 맛을 냅니다. 김치와 당면, 숙주나물을 넣은 김치만두와 칼국수는 저렴해서 원주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중앙시장 주변과 중앙시민전통시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는 예외 없이 손만두와 칼국수 그리고 두 개를 섞은 칼만두를 팝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시장 주변에 칼국수 식당들이 들어섰고 1979년 노점을 정리하면서 중앙시장과 원일로 사이에 칼국수 골목이 형성됐죠.
대부도 바지락칼국수는 1980년대 말 탄생했습니다. 경기도 안산 시화방조제 공사가 1987년 시작되면서 인부들에게 칼국수 파는 가게가 생겨나면서부터죠. 대부도 주변 지천으로 깔렸던 바지락으로 우린 시원한 육수에 감자와 호박을 넣는 게 특징입니다. 가게에 따라 칼국수를 전골식으로 손님상에서 끓여주기도 하고, 커다란 냄비에 익혀 내와 덜어 먹도록 하기도 합니다.
제주도에는 꿩과 메밀을 넣은 칼국수 맛집이 많습니다. 꿩고기가 제 맛을 내는 겨울이 더 맛있다고들 합니다. 꿩으로 우린 국물에 메밀국수와 무를 함께 넣은 꿩 메밀칼국수는 덤덤하면서도 제주다운 맛이죠. 메밀을 주 재료로 한 국수는 찰기가 별로 없어 뚝뚝 끊기고 매끄럽진 않지만 메밀 특유의 구수한 맛이 일품입니다. 모슬포와 우도에는 고둥의 제주말인 보말을 넣은 보말 칼국수가 유명하지요. 깊은 감칠맛이 나는 다시마를 넣은 국물에 쫄깃한 면발을 넣고 유부와 김, 고추와 콩나물을 고명으로 올립니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