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사라지게 될 집의 시간들… 예술로 남다
깨진 벽, 뜯겨나간 문… 아파트 재건축을 돈의 시선에서 비켜나 예술로 기억하기에 집중
사진·다큐멘터리… 그때 그곳을 곱씹게 해줘
호가(呼價)는 널뛰어도 추억은 여전하다. 재건축 덕분에 평당 가격으로 더 자주 호명되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단지 역시 마찬가지다. 사진가 이성민(38)씨는 지난 1년간 이곳을 드나들며 사진 프로젝트 '개포동, 그곳'을 진행했다.
1단지에 살며 초·중·고교를 나온 '개포동 키즈' 이씨는 "개포 주공을 고향으로 여기는 주민 20여 명에게 사연을 신청받아 인터뷰하고 7차례 사진 촬영을 진행했다"며 "사라지기 직전의 역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라고 말했다. 살던 동 앞에 서서 미소 짓는 가족, 풀밭에서 조용히 말라가는 빨래 등이 렌즈에 담겼다. "서울, 특히 강남의 집은 금액과 수치로만 회자되곤 한다. 다른 가치가 있음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집의 시간들’의 한 장면과 ‘개포동, 그곳’ 사진 프로젝트. /KT&G상상마당·이성민 |
대한민국에서 제일 뜨거운 이슈, 아파트 재건축으로 대표되는 '집의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잇따른다. 2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집의 시간들'은 재건축으로 최근 이주가 끝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를 다룬다. 주인공은 아파트 자체이며, 아파트가 내구해온 38년의 시간이다. "집은 우리에게 그야말로 가족이에요." "적당히 살다가 남향(南向)으로 이사가야지…. 그러다 보니 28년을 살았어요." 영문 제목 'A Long Farewell'처럼 오랜 집과의 작별을 준비하는 세대원 13명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깔리며 집의 의미를 묻는다. "저 문을 볼 때마다 대체 몇 번이나 드나들었을까. 이 집을 뭐라고 한마디로 할 수가 없는… 너무…." 말 못하는 말 속에서 관객은 더 큰 동요를 감지한다.
라야(29) 감독은 "아파트 값과 아파트에 대한 애정은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여러 형태의 사랑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건축·재개발을 소재로 하면서도 시장 논리나 폭력적 철거라는 이념적 시선에서 비켜나 '흔적의 기억'에 집중한다. 지난 4월엔 40년 넘은 서울 관악구 강남아파트 재건축을 소재로 한 프로젝트 전시 '투명함을 닫는 일과 어두움을 여는 일'이 아파트 18동에서 열렸다. 10명의 젊은 작가들이 아파트와 주변 잔존물을 탐사해 작품을 만들고 아파트 내부에 전시했다. "남기고 간 가구,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 빛바랜 건물 외벽 모두 강남아파트의 마지막 초상"이 됐다. 관람객은 방 보러 온 사람처럼 집 안 구석구석을 거닐며 미디어아트와 설치 작품 등을 감상했다.
사진가 박기호의 ‘통일로’. 재건축과 재개발을 소재로 집의 의미를 묻는 일련의 사진은 한지에 인쇄돼 과거에 대한 아련한 감정을 강화한다. /한미사진미술관 |
감정 과잉의 메시지를 배달하는 대신 조용히 상념(想念)을 건드린다. 서울 한미사진미술관에서 20일까지 열리는 사진가 박기호(58)씨의 '그 이후…' 전시는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철거를 앞둔 재개발 지역을 촬영한 기록. 서울 돈의문부터 미아·북아현·길음…. 'Silent Boundaries(고요한 경계)' 연작은 동네를 가르는 물리적 경계이자 그곳 사람들이 관통해 온 시간의 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깨진 벽과 벽지, 뜯겨나간 문과 균열 등의 풍경이 인화지 대신 한지에 인쇄돼 공사용 철근 사이에 매달려 있다. 한지 덕에 소박해진 색감의 이미지가 작가의 어릴 적 기억과 중첩되는 정겨움을 증폭한다. 13일엔 아이 동반 가족을 대상으로 집 짓기 공예와 가족사진 촬영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미술관 측은 "사진은 이미 사라진 과거의 흔적이나, 그 흔적을 통해 의식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당시의 장면을 곱씹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곳에 삶이 있기 때문이다.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