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여행지, 나미비아
채지형의 여행살롱 1화
나미비아라면 할 말이 많습니다. 1년간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오니, 만나는 이마다 저에게 묻더군요.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요.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언제나 답은 나미비아였습니다. 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런 나라도 있냐는 반응이 날아오곤 했죠. 그러면 아프리카 지도를 펼쳐들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왼쪽 위에 있는 땅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꽃청춘 덕분에 이제는 지도를 펼치지 않아도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보검님.
나미비아가 왜 좋았냐는 물음에는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왜 사랑하는 지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유를 들어보자면, 놀라움이 가득한 땅이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나미비아에 있는 내내, 순간순간 놀라움의 연속이었으니까요. 놀라움의 이유 중 하나는 제가 만난 진정한 첫 아프리카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나미비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던 것도 나미비아에 더 감동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 같고요. 기대하지 않은, 상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받은 엄청난 선물은 나미비아를 깊이 간직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미비아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때는 듄45(Dune45)에서의 순간이었습니다. 듄45는 나미비아의 아름다운 나미브 사막 가운데 있는 모래언덕 이름입니다. 캠핑을 하고 있던 캠프사이트에서 눈곱을 떼고 차에 탄 시각은 새벽 4시. 사막의 새벽은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나게 할 정도로 추웠습니다. 삼십분 쯤 달리니, 눈앞에 거대한 모래 언덕 하나가 나타나더군요.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모래언덕이 사막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래언덕이 뿜어내는 카리스마가 남다르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놀라움의 공간
일출을 보는 곳은 듄45 꼭대기. 부지런히 올랐습니다. 한번 발을 디디면 종아리까지 쑥쑥 빠졌습니다. 가까스로 오른쪽 발을 들면 왼쪽 발이 어느새 모래 속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가는 친구 산드라가 만든 발자국에 발을 넣었습니다. 한결 편하더군요. 이곳에서 마저 앞서 간 이의 도움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땀을 훔치며 잠깐 서 있는 사이 모래 위에는 바람이 만들어 놓은 물결무늬가 생기더군요.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미끄러질 것처럼 매끈하던 모래언덕에 긴 발자국 철로가 놓여 있었습니다.
드디어 듄45 정상. 수천 년을 살아 온 사막의 바다 위로 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저도 모르게 넋을 놓게 되더군요. 왼쪽에 펼쳐져있던 고고하던 달도 슬슬 퇴장을 준비하며 해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막은 점점 오렌지 빛으로 변하며 베일에 감춰둔 수줍은 자태를 드러내고 그와 함께 왼편의 달은 우아한 보랏빛 카페트를 깔듯 또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음과 양이, 알파와 오메가가 우주에 함께 하는 느낌은 그 어느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어찌 아름답던지, 이렇게 황홀한 광경을 만난 적이 있었던지,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그저 해가 뜨고 있을 뿐이었는데, 왜 눈물이 나는지. 살아온 시간들과 그 시간들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영화의 엔딩장면처럼 흘러갔습니다. 찰라가 영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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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만년 흔적을 스쳐 지나다
해는 금방 하늘 위로 높이 올랐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이죠. 여운을 느낄 겨를도 없이 저는 부지런히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날 제가 식사당번이었거든요. 온 몸에 듄45의 에너지를 품고 내려왔습니다.
나미비아의 여러 날 중 나미브사막에 머물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듄45와 함께 데드플라이(deadvlei)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플라이’란 아프리카 부족어로 ‘물웅덩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요. 죽은 물웅덩이라는 뜻처럼 데드플라이에는 넓디넓은 마른 웅덩이가 있더군요. 강이었던 곳이 세월이 흘러 사막으로 변한 곳이라더군요.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강이 어떻게 이렇게 말라버릴 수 있는 지, 놀랍기도 했지만 오싹함도 밀려들더군요.
그러나 오싹함은 잠깐. 기기묘묘하게 균열을 이루고 있는 흙바닥과 죽어서도 꼿꼿함을 유지하고 서 있는 고목들, 호수의 바닥이었을 그 바닥의 묘한 흙색,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상에 올려놓은 것처럼 만들어주는 모래언덕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다른 행성에 들어 온 것 같은 기분을 안겨줬습니다. 죽음을 퍼포먼스로 만들면 이렇게 형상화될까. 다시 한 번, 제가 현실의 공간에 서 있는 것이 맞는 지 의심스럽더군요.
'사막을 느껴봐, 그리고 깊이 간직해'
첫 회부터 말이 많습니다만, 나미비아에서 제가 인상적이었던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드릴게요. 저는 인생에서 사막은 꼭 한번 가 봐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요. 사막이야말로 오롯이 자신과 자연을 마주하게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미비아를 여행할 때, 트럭을 타고 이동하고 저녁에는 캠핑을 했습니다. 하루에 4~500km 씩 달리곤 했었죠. 그날도 한참 먼지 날리는 길을 달리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 트럭이 멈췄습니다. 아프리카 여행을 안내해주던 토스카가 밖에서 나오라고 손짓을 하더군요. 차 안에서 보던 사막과 발을 딛고 본 사막은 다른 느낌이었어요. 햇살은 그 속에 칼이라도 품은 듯 잔인하게 내리 쬐고 있었고 사방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보였죠. 허전함이랄까, 황망함이랄까. 눈에 보이는 것은 토스카와 사막을 달리느라 조금은 지쳐 보이는 트럭, 그리곤 흙뿐이었습니다.
“자, 이제 서 있는 자리에서 5분만 걸어봐. 앞에 걸릴 건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 끝도 보이지 않는 길 한가운데 있는 거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숨을 쉬어 보는 거야. 단, 뒤는 절대로 돌아보지 마. 뒤를 돌아본다면 돌로 굳어버릴지도 몰라.”
난데없는 토스카에 주문이 당황스러웠지만, 하라는 대로 해봤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사막 한 가운데서, 마치 퍼포먼스를 하듯 한 방향을 따라 느릿느릿 걸었죠. 뭘까, 이런 기분은.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듯한 이 기분은 뭘까 물음표가 떠올랐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숨을 쉰다는 것.
몇 걸음 걷지 않은 것 같은데, 와락 외로워지더군요. 그리곤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어요. 토스카는 어디에 있는지, 트럭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더군요. 이런 마음이 들까봐 토스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것이었구나 싶었습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더 내디뎠습니다. 토스카의 주문에는 없었지만 잠시 사막 위에 앉아, 뜨거운 열기로 달궈져 있는 흙 위 알아보지 못할 글을 혼자서 한참을 끄적거리기도 하고요. 나미비아의 쏟아지는 햇살에 잡념을 다 태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앉아있었지요.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여운은 길었습니다. 제자리로 돌아온 친구들은 막 미사를 올리고 나온 신자들처럼 숙연해졌어요. 나미비아 국경을 막 넘었을 때의 명랑만화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그 시간동안 가슴에서 꺼낸 이야기와 사연들은 다 다를 겁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들이 각자에게 오래오래 기억될 시간이라는 것은 서로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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