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고 나서 [영화]
강요된 선은 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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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첫 장면이다. 주인공 알렉스이다.
그의 두 눈에는 폭력을 향한 갈망과 천진난만한 잔인함이 빛난다. 알렉스는 보호감찰을 받고 있는 한 10대 소년으로 밤마다 집을 나와 패거리와 함께 온갖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길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를 흠씬 두들겨 패기도 하고, 자동차를 훔쳐 폭주한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강간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가 이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단 하나이다. 희열.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 속에 폭력과 섹스가 주는 쾌감만을 상상하는 그는 사이코패스에 다름없다.
결국 그는 한 농장에서 강도 짓을 하던 중 사람을 죽이게 되고, 친구들의 배신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감옥에서도 그의 폭력성은 변하지 않는다. 신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예배 일을 돕고 있지만, 그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성경 속 예수의 고난을 보며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마치 자신이 예수에게 채찍질하는 로마 군인이 된 듯한 상상을 하며 폭력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게 감옥 생활을 한 지 2년차가 됐을 때, 그는 어떤 소식을 듣게 된다. 2주만에 감옥을 나갈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루도비코 요법이라는 새로운 치료방법에 응하는 것이었다.
이는 폭력이나 성적인 것을 접하면 신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도록 뇌를 개조하는 치료방법으로, 새롭게 들어선 정부가 사회 안정 및 정권 공고화를 위해 강력히 추진하는 정책이었다. 그렇게 알렉스는 약물을 주입당하고, 폭력적인 영상을 보면 구역질을 하고 몸에 힘이 빠지도록 설계된다.
장관은 자신의 결과물에 뿌듯해한다. 그리고 사회에 나간 알렉스는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의 피해자들을 하나씩 만나며 죄값을 받는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이 엿보인다. 알렉스는 두들겨 맞기도 하고, 물고문을 당하기도 하며, 자살을 하도록 유도되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다보면 ‘선’이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생각은 과연 강요된 선이 진정한 선인가에 대한 지점이다. 장관이 실험 결과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에서 장관과 신부가 나누는 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장관: 여러분, 보시다시피 실험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악에 대한 거부감으로 선택을 택하게 됩니다. 폭력적인 의도가 생기면 강한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 고통을 없애려면 실험 대상은 즉각 자신의 의사를 그 반대로 바꿔야 하죠.
신부: 선택! 이 친구에겐 선택이 없었던 것 아니오? 이기심. 육체적 고통이 두려워서 좀 전의 그런 굴욕적인 행동을 했던 거요. 무성의한 행동이었다는 게 분명했소. 나쁜 짓은 멈췄지만 도덕적인 선택이 불가능한 존재가 됐잖소.
장관: 신부님, 그런 건 미묘한 문제입니다. 동기나 도덕 따위는 우리 알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범죄를 줄이는 것뿐이고 죄수가 넘쳐나는 감옥을 비우는 것입니다.
악과 선 중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선택한 선이 정말 진정한 선인가?
결과론적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발적으로 선을 택하는 것만이 진정한 선인가?
이 영화를 제작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극히 중요한 교훈은 전적으로 선택에 대한 질문에, 그리고 인간이 악해지겠다는 선택권을 갖지 않았을 때도 선해질 수 있느냐를 묻는 질문에, 이런 선택권을 더 이상 갖지 못한 존재가 여전히 인간인지를 묻는 질문에 달려 있다.”
이 주제를 놓고 친구와 토론하며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결국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분의 답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