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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던 나의 자화상을 끌어안기까지

흔히 한국인은 ‘빨리빨리’의 민족이라고들 한다.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는 역정을 내는 다혈질인 민족 말이다. 어딘가 고상한 이미지가 아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층간 소음을 견디다 못해 윗집을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 의미도 없는 보복운전을 시도하는 사람들, 모니터 밖의 사람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쏟아내는 모니터 안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뉴스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살아가고 있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드라마 <성난 사람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두 아시아인이 난폭 운전 사건으로 지독하게 얽혀 서로에게 분노를 쏟아내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로드 레이지였던 사건은, 점점 끝도 없이 커져 가며 종국에는 둘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게 된다. 그들은 어쩌다 그 지경까지 다다르게 된 걸까?

왜 이렇게 화가 났는가

미묘하다. 그 미묘함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난폭운전은 그들의 화를 밖으로 표출시킬 하나의 계기였을 뿐, 사실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작중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한국인 남성인 대니는 조그마한 일에도 ‘Fxxx’을 남발하며,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삶을 사는 듯한 중국인 여성 에이미도 항상 터질 듯한 화를 누르고 있는 듯한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체 왜들 이럴까?


사실 둘은 매우 다른 형태의 인생을 살아가지만, 시청자인 우리는 둘의 모습에서 어딘가 비슷한 점을 찾게 된다. 아니, 의식적으로 찾으려고 노력한다. 감독이 아무 이유도 없이 두 주인공을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아시아인으로 설정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둘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다 보면, 둘 모두가 ‘외로운 외지인’이라는 공동의 처지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연줄도 없이 미국 사회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대니와, 살아남기 위해 일만 했기에 늘 이해관계를 따지기에 바쁜 에이미. 나아가 마땅한 수입원 없이 살아가며 여자나 밝히는 대니의 동생 폴, 주부로 살아가며 자아실현에 실패하는 에이미의 남편 조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침낭 속에 들어가 남을 욕하기에 바쁜 비서 나오미까지. 작중 등장하는 아시아인들은 거의 모두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작중 아시아인들의 병으로 언급된 ‘유당불내증’처럼, ‘하얀’ 주류 사회의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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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진 외로움은,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외로움은 해결되지 못한 채 켜켜이 쌓여만 가다가, 점점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분노’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 그들은 ‘나 여기 있다’고 소리를 지르며 세상에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인 대니와 에이미가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순간은, 그렇게 표출한 분노로 서로를 짓밟았을 때뿐이었다. 온통 하얀 세상 속에서 무기력하게 외로워하다가, 누군가에 대한 증오로 빨갛게 타오르고 있음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말이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너, 그리고 나

드라마는 10화 내내 타인을 향한 분노로부터 뻗어나오는 무모하고 극단적인 행동들을 담아낸다. 현실 속의 우리는 대개 오늘 화가 나더라도 내일을 위해 묻어두기를 택하지만, 이들은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 서로를 향해 증오를 쏟아낸다.


때문에 이 드라마가 여느 복수 드라마와 다른 점은, 시청자들이 주인공을 응원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쳐다보게 된다는 점이다. 당장 <더 글로리>를 보더라도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문동은에게는 복수의 동기가 차고 넘치지만, 이 드라마의 대니와 에이미에게는 그렇게까지 필연적인 복수의 동기가 없다.


어쨌든 꼬일 대로 꼬인 상황 끝에, 둘은 결국 단둘이서 인적이 드문 어느 숲에 갇히게 된다. 당연히 처음에 둘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밀어 넘어뜨리며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살벌하게 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단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먹을거리를 찾다가 환각을 유도하는 열매를 먹고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그들은, 그때부터 지금껏 하지 않았던 진솔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사실 너에게 그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었고, 난 그저 외로울 뿐이었다는 내면의 언어들을.


그러다가 그들은 서로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서로를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다. 대니는 에이미가 되고, 에이미는 대니가 된다. 길고 긴 싸움 끝에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결국 그들이 서로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제서야 시청자들은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서로를 향한 증오에 골몰하는지 알게 된다. 너는 ‘분노에 차 있는 외로운 아시아인’이니까. 너는, 내가 가장 꼴보기 싫어했던 나의 단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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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그들의 분노는 곧 자신을 향한 혐오였다.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에 대한 울분이 향해야 할 곳은, 당연히 나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동안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누군가를 향해 그 분노를 쏟아내면 자신에 대한 혐오도 사라질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 바람대로 그들은 자신과 가장 비슷한 서로를 짓밟을 때 살아 있음을 느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결국 되돌아온 건 더 큰 파국이었고, 더 큰 분노였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야기의 결말부에서 에이미가 병실에 누워 있는 대니를 꼭 안아주는 건 그래서다.


에이미는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지만, 사실 그럴 리는 없다. 그녀는, 적어도 그녀 자신만큼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키 작고, 미아보다 예쁘지 않고, 말 못할 분노로 차 있으며, 외로운 아시아인인 자신을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대니는 자신과 쏙 빼닮은, 그녀가 직시해야 할 자신의 부끄러운 자아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자아에게 내내 욕만 퍼붓던 에이미는,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미워하던 자신의 일부를 끌어안는다. 만신창이가 된 나의 모습을, 이제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길 바라면서.

내면이 성숙한 어른으로 나아가기 위해

분노를 통해 사랑과 포용을 그려내는 이 드라마는, 단순히 우리에게 “화를 내지 마라”고 종용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저마다 말 못할 화를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족속인 한국인이 바로 우리니까. 우리는 우리를 분노케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분명 언젠가 후회할 무모한 실수를 하고야 말 테다. 이성적인 상태에서 드라마를 볼 때는 멍청해 보였던 대니와 에이미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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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두 번 화를 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나 자신을 대화해야 할 상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일이다. 바라보고 싶지 않은 나의 이면이 있더라도, 그걸 꺼내들어 똑바로 마주할 결심을.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사소한 실수에 격분하지 않을 충분한 여유가 흘러나올 수 있을까. 결국 무의미한 분노는 언제나 나의 조급함과 열등감으로부터 출발하니, 남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분노에 의한 파국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단단한 내면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한 멀고도 험난한 길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대니와 에이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혐오에 사로잡혀, 결국 영혼은 그 시절에 갇힌 채 몸만 걷잡을 수 없이 커버린 아이였다. 그러니 우리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나아가고 있는 나는 진정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한 번씩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성난 사람들’이 아닌, ‘성숙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강민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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