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미안해."
"뭘 잘못했는데?"
"알면서 그래. 신경 쓰이게 만들었잖아."
"앞으론 절대 혼자 안 둘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4회에선 주인공인 35살의 대리 윤진아가 4살 어린 연하의 연인 앞에서 잔뜩 주눅이든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는 장면이 있다. 헤어진 전남친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여주가 마치 모부에게 혼쭐이 나는 아동마냥 그의 감정부터 살피는 것이다. 한번으로도 충격적인 이 구도는 1회부터 7회까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차례 연출된다. 이러한 재현 속에 담긴 함의가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를 알아보자.
여주의 구남친은 직장으로 찾아와 무력을 사용해 여성이 원치 않는 스킨쉽을 자행한다. 이것은 명백한 데이트폭력이자 성폭력이다. 그런데 피해자인 윤진아는 도리어 남주에게 미안한 기색부터 내보인다. 그는 무엇을 사과하는 것인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로 인해 스스로에게 죄를 묻고 단죄하려는 행위, 그런 여성을 준엄하게 꾸짖는 남성의 태도야말로 바로 지금, 현재를 살고있는 우리 여성들이 강도 높게 비판하는 강간문화의 전형적인 형상이다. 이와 같은 연출은 미투 운동으로 폭압적인 남성권력과 남성중심사회에 항거하는 여성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선 너무나 부적절하고 모욕적이다. 범죄 행위인 성폭력이 여주와 남주의 관계 발전용으로 가볍게 소비되는 서사는 지나치게 모욕적이며 시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제작진과 작가의 게으르고 무딘 성인지 감수성을 보여준다.
서준희는 여성들의 구원자인가?
언제까지 성폭력을 자행하는 남성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침묵하거나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미디어에서 마주해야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린 여성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이 되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기 위해 돌아온다"는 페미니즘 역사서에 기록되어도 무방한 명언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선 그러한 서사가 없다. 주인공인 윤진아는 항상 타인의 도움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비춰진다. 때문에 가장 화가 나는 것이 여주의 사건을 처리하는 전지전능한 해결사이자 구원자로서 남주인 서준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모든 주체적 서사는 남성 캐릭터에게 할당되어 있다. 전남친의 성폭력 사건뿐만이 아니라 직장 내에서 윤진아가 겪었던 성희롱을 포함한 모든 사건들은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성차별적 문제를 가시화하기 위함 혹은 현실고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준희의 구원자 역할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중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밥 잘 사주는 예쁜누나인 윤진아를 지칭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윤진아가 아니다. 모든 것은 서준희의 재림과 영광을 위해 마련된 장치이니 시청자들은 그저 그를 위한 찬양의 노래만 부르면 된다는 함의가 노골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자신을 구원해준 남성 품에 안겨 사랑의 언어들(그마저도 여성의 외모에 국한되어 있다)로 치유받고 위로받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진정 여성들이 원하는 로맨스인가? 남성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변화하는것, 여성의 행복은 남성에게 사랑받는 것이라는 가부장적 체제의 또 다른 매카니즘으로 작동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서준희는 현실에선 찾아볼 수 없는 조신한 남성상이 아니다. 외모를 제외하고 그의 언행만을 살펴본다면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보통의 한국남성과 같은 의식체계를 지니고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왜 호구잡혀서 그런일을 당하냐", "죽지"라는 발언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만큼 폭력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남성이다. 나는 이처럼 남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훈계하는 남성과의 로맨스가 진정으로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는 <나의 아저씨>의 연장판이다. 거칠고 투박한가 그럴싸한 포장지로 외피에 변화를 주었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단순하게 소비하며 남성을 구원자로 상정하는 것. 여성에겐 치명적인 독극물이나 다름없는 컨텐츠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심지어 여성조차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은 위험하다. 그것이야말로 여성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된 낮은 자존감과 의존성, 애정결핍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임을 방증한다.
우리의 구원자는 우리 자신.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에 의하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이상화, 신비화, 찬사를 통해서- 여성의 계급적 열등감을 무화시키는 남성의 시각이 교체하는 과정일 뿐이다. 불행히도 구원자 포지션을 담당하는 남성과의 로맨스물에 열광하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남성은 구원자가 아니다. 그런 남성은 없다. 이제 이런 낡은 구시대적, 가부장적 판타지에서 빠져나올 때도 되지 않았는가. 미투운동을 보라. 여성들 간의 연대와 저항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억압적인 남성들의 세상에 균열을 내고 있는 현실을 보자. 여성을 구원해주는 것은 남성도 아니며 여남 간의 로맨스도 아니다. 나와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는 다른 여성들과 서로간의 연대의식이다.
윤진아의 여성 상사인 부장님과 같은 여성들이다. 나와 같은 차별과 폭력을 겪었으나 용기 있게 극복한 여성들, 여성을 끝없이 자기학대와 자기혐오에 시달리도록 만드는 남성사회의 족쇄를 끊고 마침내 탈출하여 다른 여성들에게 손을 내미는 여성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자는 우리 자신들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남성과의 관계가 아닌 우리 자신과 다른 자매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과 관계 맺는 여성, 함께 새로운 의식을 창조해나가는 여성이다. 이들이야말로 여성해방의 중심이며 문화적 혁명의 근간임을 역설했던 과거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호소가 떠오른다. 나는 로맨스에만 방점을 둔 컨텐츠에는 흥미를 잃은 지가 오래전이다. 그 속에 담긴 나이브함을 마주하기가 괴롭다. 현실을 살아가는, 진짜 살아있는 여성들 간의 이야기를 보고 싶은 것이 부디 나 혼자만의 요구가 아니기를 바란다.
사진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장지은 에디터 mist08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