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백석을 읽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신기하게도 불과 며칠 사이에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여름의 열기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가을의 문턱이다. 바람의 빛깔은 얼마 전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낙엽과 닮아있는 빛깔을 띠며 동시에 찬기를 머금은 바람이 거리에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바람의 빛깔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리도 없이 스며들기 때문일까, 가을의 사람들은 공허해진다. 그리고 습관처럼 떠나간 것들과,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또는 그것을 기억하기 시작하는 순간, ‘잊혀진’ 것들은 사람들로부터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의 대상이 되어 결국에는 ‘추억’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추억이 된 것들은 많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나의 분홍색 모자, 운동장 한 구석의 녹슨 그네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한편, 추억이 되었지만 여전히 만인의 기억에 의해 영생을 얻은 이들도 있다. 김광석과 유재하가 그렇고, 시인으로는 윤동주가 그렇다.
그러나, 유독 가을과 닮은 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과 시 몇 구절 외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처 추억으로 남지 못한 이가 한 명 있다. 바로 백석이다. 그의 이름은 이미 교과서를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의 삶과 시 세계에 대한 관심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윤동주에 비해 크지 않다. 하지만 또 다시 여름이 가고 가을이 문턱을 넘는 이 계절, 우리는 꼭 한번쯤 백석을 돌이켜 보며 그의 시를 감상할 필요가 있다. 바로 지금, 이 가을. 교과서 속 백석을 걷어내고 진짜 ‘백석’의 삶과 시 세계를 들여다 볼 시간이다.
슬픈 시대의 모던보이
사실 백석이 처음 문단에 등단한 것은 시가 아니라 소설을 통해서였다. 1930년 19살의 백석은 단편소설을 통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첫 발을 내딛게 되는데, 당시 그의 작품들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다. 그러나 그가 시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이후 발표하는 시 작품에 그러한 그의 어두운 면면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구체적인 묘사를 구현해야 하는 소설의 창작 기법보다 함축과 은유를 주로 하는 시의 특징이 백석의 성향에 더 잘 맞아 백석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며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백석은 서른이 되기도 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많은 문인들에게 극찬을 받기에 이른다.
한편, 백석은 뛰어난 외모와 학식을 고루 갖춘 당대 최고의 모던보이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백석과 더불어 한국문학에 한 획을 남긴 시인이자 그의 친구였던 김기림은 “백석이 머리를 날리며 광화문에 나타나면 광화문 사거리가 온통 환해졌다”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제아무리 인기 많고 잘생긴 경성의 ‘대세남’ 백석이라 할지라도, 슬픈 시대의 비극을 비껴나갈 수는 없었다. 곧 그의 삶이 슬픔으로 얼룩지기 시작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슬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1930년대는 특히 일제의 식민 탄압 정책이 최고조에 이른 때로, 일제의 핍박과 수탈 속에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던 시기이다. 백석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에 몰두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이런 순탄치 않은 삶의 굴레는 남북 분단 후, 결국 생이 그의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분단 후 고향인 평북에서 삶을 이어가게 된 후 백석은 북한 정부로부터 시 창작에 제약을 받고, 말년에는 집단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끝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토속적인 언어로 시대를 치유하다
그러나 백석은 처참했던 시대 현실 앞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수단, 즉 시를 통해 시인으로서 어지러운 현실을 타파할 방법을 고심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만이 가진 ‘어떤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고향의 방언이었다. 그는 혼잡한 1930년대 조선의 현실과 그 암울함을 고향의 언어와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씻어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향의 언어와 풍경을 줄곧 따뜻한 시선을 통해 바라보며, 시대를 치유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기도 했다. 그의 시 속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느 작은 고향 마을의 모닥불 아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기도 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한다. 하나같이 모두 정겹고 따뜻한 동시에 그로 인해 치유가 되는 풍경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란 ‘슬픈 운명’을 지녀야 하는 사람”이라는 백석 본인의 말대로 그의 작품들 속에는 평생 자신을 괴롭혀 왔던 비극적인 삶의 굴레에 대한 슬픔에 대한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그는 먼 북방, 만주의 어느 작은 방에서 ‘흰 바람벽’을 앞에 두고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려보거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혼자 넋 없이 떠도는 보래구름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처럼 백석은 시를 통해 항상 슬픔과 따뜻한 풍경이 공존하는 그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만들어 내곤 했다.
이렇듯 조금만 장막을 걷어내고, 그의 삶과 시 세계를 좀 더 깊이 알고 난 후 백석의 시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면, 그는 단순히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옛날 시인’으로 끝나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문인이다. 특히 바람의 색깔과 질감이 여름의 그것과 다른 이 계절에, 따뜻함과 슬픔이 공존하는 그의 시는 마땅히 읽고 또 읽기에 모자람이 없다. 백석의 작품들은 마치 트렌치코트처럼, 일상에 치여 서늘해졌던 마음을 포근히 감싸줄 수 있는 온기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후면 더 완연한 가을이 우리에게 찾아들 것이다. 낙엽이 지고, 니트가 필요해지고,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난로도 곳곳에 다시 놓일 것이다. 더불어 언젠가 마음의 난로가 필요해지는 시간이 오고야 말 때, 김이 피어 오르는 커피를 옆에 두고 백석의 시집을 펴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의 온기가 시를 통해 전해지는 것을 넘어, 그가 우리에게 이윽고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출처: 나무위키, 저널로그)
김현지 에디터 hyunzi20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