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의 얼굴, 강하늘
Y의 무대인명사전
뒤늦게 영화 <스물>을 보았다. 개봉 당시 김우빈과 김준호, 강하늘이 함께 등장하는 홍보물을 보면서 ‘강하늘이 또 영화를... 요즘 정말 잘나가나보다’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미생>의 성공 이후 <쎄씨봉>, <순수의 시대>, <스물>까지 세편의 작품이 연달아 개봉하면서 강하늘의 이름이 공지처럼 꾸준히 극장에 걸려있던 때였다(본인은 오랫동안 공들여 찍은 작품들인데 공교롭게도 개봉 시기가 맞물려서 겹치기로 오해받았다며 아쉬워했다).
결과적으로 세 작품 중 가장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둔 <스물>에서 강하늘은 뻔뻔하지만 풋내 나는 영화의 분위기에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딱히 뭘 역설하고 싶지도 않고 가르칠 의지도 없는 이 시대의 청춘 성장물 속에서 그가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서 움직이고 떠드는 걸 보고 있으면 몸만 웃자란 사내아이들의 한 철을 다룬 많은 무대극들 - <히스토리 보이즈>나 <스프링 어웨이크닝> 같은-의 매혹적인 리듬감이 2015년 한국영화에서 재현되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공부 잘하는 얌전한 새내기지만 속으로는 퀸카 선배에 대한 욕망이 들끓어 오르고, 또 한편으로 그 욕망이 귀여워 보일만큼의 순정을 간직하고 있는 스무 살의 얼굴. 강하늘이 적절한 터치로 그려낸 그 얼굴 뒤로 같은 나이의 천재적인 살인자(<쓰릴 미>)나 동급생과의 육체적인 쾌락에 이끌리는 고교생(<스프링 어웨이크닝>)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관객들도 경재라는 캐릭터가 평범한 듯 종잡을 수 없는 반전의 긴장감을 어렴풋이 품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채는 듯 했다.
2000년대 중반 한국 뮤지컬 시장의 급성장 이후 뮤지컬계에서 A급 스타로 발돋움한 젊은 남자배우들이 드라마와 영화판으로 활동 분야를 넓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 되었다. 오만석, 이선균, 엄기준이 첫 세대였다면 조정석, 김무열이 그 뒤를 이었고 가장 최근으로는 주원, 지창욱, 그리고 강하늘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이쯤에서 박용호 대표(프러덕션 해븐)의 안목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각각 87년생과 90년생으로 세 살 터울인 이 트로이카 중에서 가장 어리지만 무대와 가장 긴 인연을 맺어온 것이 오늘 이야기하려는 강하늘이다.
2006년 국악뮤지컬을 표방한 창작극 <천상시계>로 첫 무대에 올랐을 당시 그는 국악예술고등학교 소속의 고교생이었다. 아직 김하늘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뮤지컬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알린 것은 일찌감치 라이징 스타 양성소 역할을 한 2인극 <쓰릴 미>를 통해서였다. 곱상한 외모에 노래와 연기 모두 기본기를 갖춘 신인, 특히 티켓파워를 가진 남자신인의 등장은 언제나 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뮤지컬계에서 환영받는 일이었고 때문에 강하늘이 <쓰릴 미>이후 화제작이긴 했지만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조역인 에른스트로 무대에 선 것이 오히려 의외의 결정이었다. 연극 <왕세자 실종사건>이나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 건실한 행보를 이어갔다.
강하늘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시쳇말로 소처럼 일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많은 작품에서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을 오가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는데 그가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낸 캐릭터들은 마냥 선량하거나 남에게 해 끼치지 않을 것 같은 순백의 소년은 아니었다. 깊이 상처받아본 적도 있고 상처 입힐 수도 있는, 조금은 위험하고 위태로운 존재지만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만 않으면 적당한 선 안에서 영리하게 타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불안감과 영민한 균형 감각이 공존하는 양가적인 분위기. 그 나이의 젊은 배우로서 이러한 정서를 갖고 있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큰 자산이다. 신인 시절부터 무대와 TV, 영화판을 가리지 않고 강하늘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았던 것 또한 이를 증명한다. 물론 부담스러울 만큼 특출하지 않은 단정한 용모 역시 가산요인이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장점과 단점을 가진 복합적인 인물의 내면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끔 형상화하는데 유능한 그가 민족시인, 영원한 청년으로 추앙받는 윤동주 역으로 이준익 감독의 신작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편의상 3인방으로 묶기 좋은 주원, 지창욱이 단번에 급부상해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것에 비하자면 강하늘의 행보는 조금 더 잰걸음으로 쉼표를 찍는 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그는 한번 뽑아드는데 게임의 승패를 다 걸어야 하는 크고 무거운 보검이라기보다는 활용도가 높고 실패확률이 적은 실용적인 검처럼 쓰였다.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서 한 뼘 정도만 비켜난 그 자리는 20대 중반의 젊은 배우가 큰 그릇으로 완성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위치일지도 모른다.
글 | Y, 일러스트 | 영수(fizzj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