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위의 배우, 박은태
데뷔 초의 박은태는 뮤지컬계에서 드물지 않은 ‘남자 크리스틴’ 중 하나였다. 평균 이상의 보컬 능력과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아직 미숙한 부분들을 너그럽게 넘길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으로 반짝이는 젊음을 가진 신인 - 어제까지는 아무도 아닌 무명의 1인이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업계의 모두가 주목하는 ‘요즘 괜찮은 배우’가 되어 있는 라이징 스타들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애초에 뮤지컬 배우 지망생도 아니었고 당연히 뮤지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공부하다가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들이 이쪽 무대에서 첫걸음을 떼게 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노래는 자신이 있었지만 춤과 연기에 대해서는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던 박은태가 새로운 도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극단 시키의 한국 진출작이었던 <라이언 킹>이 댄스 파트와 음악 파트를 구분해서 배우 오디션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오페라의 유령> 속 크리스틴처럼 앙상블로 춤추던 무명의 신인이 하루아침에 주역으로 급부상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면 더욱 드라마틱했겠지만 현실은 그 정도로 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역으로 어떤 연기를 했는지 기억하는 관객이 있을까 의문인 데뷔작에 이어 곧바로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거대한 작품의 주역 그랭구아르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은 그에 버금갈 만큼 놀라운 신분상승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송스루 형식의 프랑스 뮤지컬이라 일반적인 영미권 뮤지컬에 비해 배우의 능력치가 보컬 쪽에 쏠려 있어도 리스크가 적은 작품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운이었다. 당시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극장용 라이징 스타 사관학교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믿을만한 가창력을 가진 신선한 목소리들을 대거 발탁하고 키워내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름을 알린 모두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대에서 변함없는 기대와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몇몇은 인생 최고의 커리어가 <노트르담 드 파리>로 남기도 했고, 또 다른 몇몇은 한동안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서서히 이름을 들을 기회가 줄어들기도 했고, 박은태를 비롯한 소수만이 데뷔작을 기반으로 차곡차곡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2008년 <노트르담 드 파리>가 발탁하고 이름을 알릴 기회를 준 신인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배우가 박은태라는 것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박은태가 그랭구아르를 연기할 때만 해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놀라운 스타 탄생에 모두가 흥분하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햄릿>,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고 다시 <노트르담 드 파리>까지 어느 정도로 완성도가 보장되어 있지만 소위 말하듯 핫하지는 않은 작품에서 경험을 쌓아오다가 2010년에 이르러 <모차르트!> 국내 초연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보컬 능력을 가장 큰 재산으로 대극장에서 승부하는 뮤지컬 신인들이 한국의 관객들에게 열렬한 반응을 얻는 경우는 보통 엄청난 에너지와 끼를 무대에서 발산할 때이다. 극을 전체적으로 이끌어가는 섬세한 테크닉이 부족하더라도 작품의 하이라이트에 폭발적인 가창을 선보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면 그것으로 아쉬운 점들이 상쇄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은태는 신인 시절부터 감정을 에너지와 함께 날 것으로 터트리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대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정제되고 논리적인 연기를 시도해왔다.
송스루 형식의 대극장 유럽 뮤지컬에서 주로 경력을 쌓아오던 그가 소극장 연극, 그것도 윌리엄 하트의 그림자가 강하게 남아있는 <거미 여인의 키스>의 몰리나 역에 천하의 정성화와 더블 캐스팅이 되었을 때 ‘비주얼은 괜찮겠지만 연기는?’ 이라는 의문이 쏟아진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때 박은태가 기대 이상으로 제 몫을 해냈던 것은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건 없건 좋은 목소리와 안정적인 발성으로 좋은 곡을 잘 부르는 것 이상으로 작품에 임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뮤지컬 스타라고 손꼽히는 대부분의 배우들이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잭팟 같은 작품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박은태는 특정한 한 작품을 손꼽을 수 없이 자신이 거쳐 간 모든 레퍼토리를 통해 계단을 밟듯이 성실하게 성장해왔다. 과욕을 부리거나 한눈팔지 않는 그 꾸준한 노력이 배우로서 그가 가진 최고의 재능일지도 모른다. 폭발적으로 노래할 수 있지만 그 화려한 순간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배우가 새로운 도전이 될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에서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글 Y
일러스트 영수(fizzj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