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一家)를 이루다, 발레리나 강수진
박지성을 사랑하고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인들이 한 번 이상 그의 경기를 보았을 것이라고 짐작 가능한 것과 달리, 한국이 낳은 프리마 발레리나, 국보급 무용가 강수진의 아름다운 발을 경애하는 이들 중 그녀의 춤을 직접 본 사람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마치 21세기에 안나 파블로바나 이사도라 던컨의 팬이 된 사람들처럼, 한국의 대중들은 무대의 감동이 아니라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와 세계의 경탄, 그리고 아름다운 사진으로 그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이는 발레라는 분야와 대중의 거리감 탓이기도 하지만, 강수진이 자신의 커리어 대부분을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함께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연을 영상화하는 것에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컴퍼니의 특성 때문에 영상으로라도 그녀의 무대를 접할 기회가 드물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서는 유투브를 통해 공연 홍보용으로 풀린 영상으로나마 그녀의 무대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악한 화질의 유투브 영상 속에서도 춤추는 강수진의 가장 훌륭한 점은 여전히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캐릭터와 극에 대한 완벽한 몰입, 그리고 작품의 정수를 정신적인 영역으로 표현해내는 그녀의 고상한 태도이다. 강수진이 특별한 애정을 보여왔던 작품 <카멜리아 레이디>로 검색을 하면 그녀와 마레인 라데마케르, 그리고 강수진과 마찬가지로 드라마 발레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당대 최고의 스타 알렉산드라페리 와로벨르토볼레의 영상을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비련의 동백아가씨를 어떻게 표현해내는지를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강수진의 춤에서는 정신이, 알렉산드라페리에게서는 마음이 보인다. 그녀들은 마치 적과 흑처럼 다른 색깔로 인간의 영혼 안쪽에 있는 고통과 기쁨을 춤으로 형상화해낸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드라마 발레의 히로인일 때 특히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현재의 위치로 올려놓은 천재 안무가 존 크랑코의 <오네긴>과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녀를 지금의 자리로 끌어올린 대표작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안무가인 존 노이마이어의 걸작 <카멜리아 레이디>에서도 강수진은 운명의 파도 앞에 선 한 여인의 초상을 초월적인 에너지와 존재감으로 표현해냈다.
하지만 무대 아래의 강수진은 일반적으로 프리마 발레리나에 대해 짐작하는 예민한 자의식과 위태로운 감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오히려 스포츠 선수와 수도자를 섞어놓은 듯 간결하고 건실한 태도로 세상을 대한다.
절절한 사랑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는 가수나, 보는 사람의 혼을 다 빼놓는 신들린 연기를 하는 배우를 두고 흔히 사연이 많아 보인다고 한다. 세상사의 온갖 쓰고 달고 아름답고 추한 것을 다 맛보고서 인생을 뼈저리게 이해한 사람들에게서 그런 감성과 호소력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현자로서 강수진이 가진 저력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녀의 춤에서 세속적이거나 삿된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마치 종교적인 헌신처럼 자신의 삶을 오롯이 춤의 세계에 바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강수진은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목표를 묻는 기자에게 국립발레단만의 ‘스타일’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한 사람의 댄서로서 강수진이 이뤄낸 것이기도 하다. 피땀 흘려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고 일가를 이룬 사람에 대한 최고의 예우는 그들이 성취해낸 것을 함께 맛보고 교감하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곱씹어 말하고 열광하는 강수진의 발이 무용가로서 그녀의 뿌리라면, 춤은 그 존재의 열매일 것이다. 나무는 뿌리나 줄기가 아니라 그 열매로 자신을 증명한다. 강수진의 춤은 그녀의 발 이상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글 Y
일러스트 영수(fizzjang@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