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헤어졌는지. 혹은 왜 헤어졌는지.
이별을 소화시키는 남자 제 1화, 프롤로그
내 이름은 조태희. 직업은 연애칼럼니스트다. 내겐 하루에도 수십 건의 연애상담이 들어오는데, 그 다양한 형태의 질문들은 대부분 ‘어떻게?’ 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떻게 연애를 시작해야 하는지, 어떻게 상처를 덜 받는지, 어떻게 이별을 극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를 사랑해야할지.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 할 수 있는지.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대답은 ‘어떻게?’가 아닌 ‘왜?’이다. 왜 연애를 시작할 수 없는지, 왜 상처를 남들보다 더 받는 건지, 왜 이별을 극복하기 힘든지. 왜 나는 그를 사랑하는지. 왜 나는 사랑을 잘 하고 싶은지.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에 대한 상담을 해줘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특히 이별에 관한 문제들이 그렇다.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곱씹어봤자 더한 괴로움만 돌아올 뿐 이다. 연애기간 속에 숨어 있는 크고 작은 ‘왜?’ 들을 찾아내야 한다. 연애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별은 분명한 실패일 것이다. 실패를 곱씹어 보는 건 분명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별은 실패가 아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극복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별이 당신에게 있어 티끌이라 생각된다면 그 티끌들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는 게 옳다. 그렇게 티끌들을 모으다보면, 결국엔 성공적인 연애라는 태산에 다다르게 된다. 그래서 건강하게 티끌을 모으는 방법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나의 이별소화여행기다.
이렇게 거창한 여행은 아닙니다. |
연애칼럼니스트도 보통의 사람이다. 나 역시 행복하기 위해 사랑을 지속하려하고, 이별의 괴로움은 느끼고 싶지 않다. 다양한 경험으로 완성된 이별극복버튼 같은 건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연애에는 왕도가 없는 거다. 고백하자면, 나는 두 달 전 오늘 이별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2년여에 걸친 사랑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함께 찍은 사진을 되도록 빨리 지워야 합니다." 라고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던 내가, 핸드폰에 남아있는 수천 장의 연애사진을 여전히 지우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이별을 완벽하게 소화해야겠단 결심을 하게 됐다. 별 것 아닌 사건이었다. 언젠가의 주말, 도무지 지울 수가 없던 연애사진을 곱씹어 보고 있던 밤,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그런데!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발신인을 하필이면 헤어진 연인인 미진이로 착각(아니 기대에 가까웠겠지)해 버리고 말았다. 그 전화는 당연히 친구들의 장난 전화였다. “미진아.” “미진이니?” 수화기 너머의 침묵을 향해 힘들게 내뱉던 내 목소리는 한동안 엄청난 놀림거리가 됐다.
친구들의 놀림이 짜증났던 건 아니다. 발신번호표시제한이란 글자를 확인한 순간 반사적으로 미진이를 떠올려버린 내가 한심해졌을 뿐이다. 휴대폰에 남아 있는 연애사진이 원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사진만 지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계획을 세운거다. 연애사진을 제대로 지우는 방법, 사진과 함께 미련도 지우는 방법, 이별을 완벽하게 소화시키는 방법. 어떻게 이별했는지에 대한 후회에서 벗어나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 직시하는 방법.
1. 그녀와 함께 갔었던 맛집 들을 선정
2. 혼자서, 친구와, 혹은 새로운 여성과 그곳을 다시 방문
3. 가게 문을 나서며 휴대폰에 남아 있는 사진(해당 맛집에서 그녀와 찍은)을 삭제
우리가 연애사진을 지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진은 그 당시의 좋은 기억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싸울 때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실은 사진 속 레스토랑에서 몇 번의 말다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그런 짜증까지 담고 있진 않다. 싸우기 전의 행복한 모습, 싸우고 난 후의 화해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마냥 행복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행복했던 순간의 기록을 냉정하게 삭제해 버리는 나쁜 놈이 되기 싫은 거다. 큰 결심을 하고 삭제를 해본다 한들, 마음 속 뿌리 깊은 곳에 잔여한 당시의 기분까지 함께 쉽게 사라지진 않는다.
지울수록 선명해 지는 것들이 있기도 하구요 |
이 이별소화여행방법은 효과가 좋을 것 같다. 사진을 찍었던 곳에 가게 되면, 아마도 그 당시의 행복 뿐 아니라 짜증났던 기억까지 확실히 기억해 낼 수 있을 거다. 왜 우리가 그런 다툼을 벌였는지, 이날의 데이트가 왜 우리의 이별을 견인하게 됐는지에 대해 떠올리는 거다. 그리곤 가게 문을 나서며 사진을 삭제하는 순간, 나는 나의 냉정함에 박수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할 땐 마음껏 뜨거워도 괜찮지만 이별 후 까지 뜨거운 건 문제가 된다. 나에게도, 그리고 헤어진 상대에게도 독이 될 뿐이다. 이 이별소화여행절차는 우리가 냉정한 결단을 내려버릴 수 있게 강제성을 부여한다. 앞으로 공개될 8주간의 이별소화여행기를 통해 누군가는 이별의 극복을, 누군가는 연애의 전 과정에 숨어 있는 갖가지 ‘왜?’를 발견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이별소화여행의 첫 방문지는 미진이와 내가 처음 소개팅을 했던 장소다. 한남동에 있는 한 피자가게인데, 맛도 좋고 분위기도 좋아 첫 만남의 센스를 보여주기 좋다. 참, 미진이와 나는 꽤 검증된 맛집만을 돌아다녔다. 그러니 굳이 이별을 소화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앞으로의 여행기를 그저 맛집 탐방기로 읽어도 무관할 듯싶다.
이별소화레시피
기억을 포맷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싫은 기억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선, 기억과 나 사이에 수많은 장애물을 놓는 게 최고다. 그러니 집에 틀어박혀 옛 기억을 더욱 견고히 하는 일 따윈 하지 말길. 많이 만나고,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을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당신사이에 차곡차곡 쌓아 보는 거다. 당장은 효과가 없다 해도, 꾸준히 쌓다보면 당신의 시야를 가려줄 태산이 될 수 있다. 여러분도 여러분만의 이별소화여행기를 계획해 보는 걸 추천한다. 필자 혼자 지질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는 결코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