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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소화시키는 남자 제 10화, 에필로그

있을 때 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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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에 쏟는 집중력이 최고점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낯선 것을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익숙하던 그것이 사라져버린 빈자리가 낯설어질 때. 


무언가를 완전히 떠나보내고 난 후에야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게 되는 이유는 뭘까. 몇 년 전의 숭례문도 그랬다. 주변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것을 딱히 의식하거나 집중해서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늘 그곳에 있었으므로. 내가 바라보지 않아도 그곳에 있을게 분명하니까. 


숭례문이 갑작스런 집중을 받게 된 건, 그것이 방화로 완전히 소실되고 난 다음날이다. 버스 안의 열어젖힌 창문에선 사람들의 광기어린 관심이 쉴 틈 없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그 속에 내 시선도 있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제는 터가 돼 버리고 만 숭례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오래전부터 네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듯이... 뭔가 부끄러워져 서둘러 창문을 닫아 버렸던 기억이 있다.  


사라져버린 것들은 말이 없다. 있을 때 잘하지! 라며 면박을 주지도 않는다. 되려 자신을 맘껏 추억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준다.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먹먹한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은 그것을 사라져버리게 한 것에 대해 치러야 할 일종의 대가와도 같은 거다. 우릴 괴롭히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놓은 함정 같은 게 아니다. 그러니 이별을 원망해선 안 된다.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미워해도 안 된다. 


낯설음을 극복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건, 떠나버린 것이 아닌 나 자신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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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야 할까. 어디서부터 우린 잘못됐던 걸까. 어느날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너와 이별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귈 수 있었을까? 적어도 이별의 말을 내뱉었던 토요일 아침으로 돌아가 데이트를 취소하기라도 했다면, 집에서 쉬고 싶단 네 말을 서운하게 듣지 않고 데이트를 하루만 미뤘다면 어땠을까... 혹은 ‘나는 지금 불행해’ 라며 처음으로 서운함을 드러냈던 그 날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그래서 꼬이고 꼬였던 매듭을 애초에 잘라내고, 잘못 채워진 첫 단추를 풀어 다시 옷깃을 여미었다면 우린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래봤자 그저 잠깐 동안의 이별유보일 뿐이었을까... 


한낮의 햇볕보다 슬픔이 더 따가웠던 지난 초여름엔, 그녀를 소개받기 전의 하루쯤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게 호감을 표했던 K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미진이를 소개받지 않았다면 이런 슬픔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에 나는 되뇌었다. 오전엔 거짓말을 했다고. 소개팅 이전으론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름 모를 시간여행자에게 말했다. K의 마음보단 미진이의 존재를 알게 된 게 내겐 더 반가운 일이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미진이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되는 건 싫었다.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온 30여년보다, 미진이와 함께 보낸 지난 2년이 내게는 더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땐 이별소화여행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한창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날 미세할 확률을 믿었던 것 같다.


그날 난 정말로 시간 여행을 하는 꿈을 꿨다. 내가 도착한 곳은 그녀와 함께 보냈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관찰자와 주인공의 시점이 혼재된 그 꿈 속 에서, 우린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씻지도 않고 동물농장을 보다가 배가 고파진 우리는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그녀는 오뎅탕을 끓였다. ‘요리는 정성이야 역시.’ 라며 웃는 그녀를 보며 밥을 먹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선 음악을 좀 듣다가, 그녀가 좋아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연달아 봤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집 밖으론 한 번도 나가지 않았던 아주 평범한 일요일. 외부의 공기가 전혀 뒤섞이지 않은, 나와 그녀의 향기로만 가득찬 집에서 보낸 휴일. 


나의 무의식은 그 일상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여겼던 걸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또 다시 할 필요는 없다. 현실에서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다른 누군가와 충분히 그런 일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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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가을 날씨다. 저녁엔 소개팅을 하기로 했다. 낮엔 청소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데이트를 생각하고 솔로는 청소를 생각한다는데 그 말이 틀리진 않는 것 같다. 버리지 않고 놔뒀던 것들을 마침내 정리했다. 박스가 몇 개 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면 버릴 수 없을 것만 같아서 통째로 버려버렸다. 청소의 마무리로 셀프빨래방엘 갔다.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빨래를 옮기다 빨랫감을 몇 개 떨어트렸다. 매번 이렇다. 한 번에 옮기려하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나눠 옮긴다면 떨어트리지 않을 걸 알고 있다. 이젠 천천히 조금씩,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겠다. 그래도 오늘의 소개팅을 앞두고 한 두어 가지 정돈 바라는 게 있어도 괜찮겠지?


친구 같은 연인이 됐으면 좋겠다. 진짜 친구와는 아무리 기를 쓰고 싸운다 해도 절교는 하지 않는다. 그런 친구 같은 연인과 이별 없는 만남을 하고 싶다. 그 만남에는 이유가 중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유가 필요하고 이유를 찾는다는 건 신뢰가 없단 증거다. 이유를 찾지 못해 결국 헤어지고야 마는, 좋아하는데도 이유가 필요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데도 이유가 필요한 그런 관계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침 만나기로 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기, 장소를 좀 바꿔도 될까요?”

- 네. 괜찮아요. 어디에서 볼까요?

“어제 TV를 봤는데, 피자랑 맥주가 너무 맛있게 보여서.”

- 그래요 그럼. 피자 먹으면 되겠네요.

“장소도 제가 정해도 돼요? 가보고 싶은 곳 있거든요.”


꽤 적극적인 사람이다. 이런 경우는 드문데. 왠지 괜찮은 예감이 든다.


“잭슨피자라고 아세요? 거기 최근에 TV나왔었는데 맛있게 보이더라구요”


웃음이 났다. 하필 미진이와 처음 소개팅을 했던 곳이라니. 하지만 그곳은 TV에 나온,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피자와 맥주를 먹기 위해 방문하는 맛집일 뿐이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잠깐 고민을 하다 그녀에게 대답했다.


- 괜찮을 것 같아요. 거기서 봐요.


- 끝 -

이별소화레시피

평생 단골이 될 맛집을 찾은 당신. 다른 가게에 눈돌리지 않고 그 곳에만 갈 자신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곳은 내가 원할 때 까지 계속해서 같은 맛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갑자기 문을 닫아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스스로 맛있는 음식, 아니 사랑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추는 거다. 누군가가 아주 잘 만든 그것을 찾아내본들,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양껏 맛볼 수 있진 않다. 상대에게 휘둘리거나 의존하지 않는, 본인만의 사랑의 레시피를 가져야 한다. 그것만 제대로 갖춰놓는다면 이별을 소화시키는 레시피 따윈 필요가 없어질 거다. 이젠, 이별소화레시피 대신 사랑의 레시피를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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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소개글
불만보단 불안을 즐깁니다. 요즘남자요즘연애 [소담]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