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개와 고양이의 연애

이별을 소화시키는 남자 제 4화

희생을 하는 게 사랑이 아니다.

상대의 희생을 제대로 인지하는 게 사랑이다. 

연애는 남자를 성장시킨다. 맛집 정보의 획득은 성장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그녀의 만족을 위해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레스토랑과 그곳의 메뉴들을 습득해 나간다. 이곳, 애견을 동반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다. 미진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강아지들이 보는 앞에서 파스타를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개와 고양이의 연애

애견카페는 꽤 흔하지만, 애견동반입장이 가능한 파스타 가게는 독특한 컨셉인 듯하다.

연애를 한 지 세 달쯤 흘렀을까. 당시의 난 ‘어떻게 해야 그녀가 좀 더 즐겁게 웃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가 나를 더 보고 싶어 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미진이가 언젠가부터 한 블로거가 키우는 시바견 사진을 보내주고 있단 거였다. 시바견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 미진이의 모습을 상상한 난, 수소문 끝에 지인의 친구가 시바견을 키우고 있단 사실을 알아냈다. 미진이 몰래 그 시바견과의 만남을 기획하던 중 찾아낸 장소가 이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그날 우린 이곳에서 처음으로 심각한 언쟁을 했다. 선호하는 연애의 방식과 사랑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미진이와의 언쟁을 얘기하기에 앞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연애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보자. 

 

1. 평범한 사람과의 평범한 연애

2. 특별한 사람과의 특별한 연애 

3. 평범한 사람과의 특별한 연애

4. 특별한 사람과의 평범한 연애

 

나는 4번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꿈 꿔오던 이상형에 딱 맞는 특별한 사람과 평범하게 연락을 나누고, 평범하게 일상을 주고받으며, 큰 사건사고 없이 이어지는 보통날들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4번 형태의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이별에 대한 걱정을 덜 수도 있다.

 

1번도 괜찮다. 바라던 이상형은 아닐지라도,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특별한 사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게 사랑의 힘이니까. 1번 역시 결혼으로 귀결될 수 있지만, 평범함이 지나친 따분함으로 발전할 경우엔 이별의 가능성도 높다. 다행인건, 이때의 이별이 주는 슬픔은 그나마 견딜만하단 거다. 그래서 연애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1번과 4번 같은 평범한 연애를 선호한다. 특별한 힘을 들이지 않아도 함께 걷는 길이 즐거울 수 있는 연애, 그렇게 보폭이 잘 맞는 연애는 희귀하단걸 알기 때문이다. 

개와 고양이의 연애

말이 통하지 않는 강아지보다 더 힘든 게 사람과의 산책이다. 스스로의 보폭에 대한 고집이, 둘 사이의 거리를 떨어트려 버리기도 하니까.

연애초보들은 2번과 3번에 대한 환상이 있다. 영화같이 특별한 연애를 꿈꾼다. 연애는 해피엔딩이 보장된 러닝타임 120분짜리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그 장르가 반드시 멜로나 로맨스 코미디란 보장도 없다. 특별함이 빛나는 만큼 그 이면의 그림자도 있는 법. 심지어 그것이 스릴러나 미스터리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연애에 빠져버리는 걸까. 사랑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낭만을 느끼기 때문이다. 특별한 연애 중인 두 사람의 보폭은 사실 큰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낭만주의자들은 그 차이를 극복하는 걸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상대의 보폭에 무조건 맞춰 걸으려는 그 무리한 노력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믿는다. 사랑의 힘이 있으니까!

 

마침내 이별을 수차례 경험한 후에야 그들은 깨닫는다. 사랑의 힘만으로 사람의 욕심과 이기심을 이겨내는 건 꽤 어렵다는 것을. 특별한 연애는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이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방적인 노력이 선사하는 낭만을 버릴 수가 없다. 아픈 현실을 억지로 외면해야 하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로 살아가길 자처하는 거다.

 

난 사실 그런 낭만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한 도취에 따른 댓가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고, 미진이와의 연애는 4번으로 진행되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이 곳에서의 싸움을 기점으로 뭔가 바뀌어버렸다. 하필이면 선호하는 해장방식의 차이도 아닌, 연애방식의 차이에서 너무 큰 보폭차를 깨닫게 된 것 이었다. 개와 고양이의 생활습성을 얘기하던 도중이었다.

개와 고양이의 연애

“강아지는 늘 산책을 시켜줘야 하지만, 고양이는 함께 산책을 시킬 수가 없어.”

“강아지는 늘 주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지만, 고양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길 원해.”

“강아지는 모든 일에 학습이 필요하지만 고양이는 자기 영역을 남이 간섭하는 걸 싫어해.”

 

진즉부터 깨닫고는 있었다. 미진이는 연애의 낭만을 외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영원한 사랑의 존재를 믿었고, 미진이는 그걸 믿으면 상처만 받을 뿐이라며 웃었다. 행복한 연애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상대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라는 나완 달리, 미진이는 관심 사이의 무관심이 훨씬 더 중요함을 강조했다. 사랑하는 이라면 나의 영역을 얼마든지 침범해도 좋다 말했고, 그녀는 개인영역을 침범하는 게 가장 싫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강아지를 닮아 있다 했다. 그리곤 자신은 고양이라고 말하며 강아지와 고양이를 모티브로 한 애칭을 정해버렸다. 

 

연애방식의 취향 차는 꽤 심각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난 그저 애칭이 만들어졌단 기쁨에 취했다. 그리고 여느 연애 초보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하기로 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운해하지 않을 거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네게 사랑을 줄 수 있음에 기뻐할 거다. 너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내가 지나치게 네게 맞추는 특별한 연애형태라도 상관없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난 이미 미진이가 내뱉은 다음의 말에서 충분히 서운함을 느꼈던 게 분명하다.  

 

“오빠. 이런 자리를 만들 땐 나한테 꼭 이야길 해줘. 말없이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 보이는 거 싫단말야. 여기도 봐.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사람은 잘 없잖아? 고양인 본인 허락 없이 사람들에게 자길 내보이는 걸 싫어하거든. 이제 내 허락 없이 지인과의 만남 주선하지마.”

 

난 그저 강아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너는 왜 그건 몰라주는 거지? 나의 노력을 제대로 치하해주지 않는 그녀에게 서운했지만, 우선은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썼다. 그때부터 시작됐다. 함께 먹는 음식, 주말에 보는 영화, 연락하는 빈도, 그 모든 걸 총괄하는 연애하는 방식까지. 나는 내 취향을 대부분 갈무리하고 그녀의 취향에 맞춰 나갔다. 물론 그녀가 그런 희생을 직접 요구하진 않았다. 그러니 그녀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게를 나서며 사진을 지웠다. 오늘의 삭제는 미련이 좀 덜 한 것 같다.

개와 고양이의 연애

연애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보게 해준다. 강아지가 좋은지 고양이가 좋은지. 크림파스타가 좋은지 토마토 파스타가 좋은지. 사랑을 받는 게 좋은지 주는 게 좋은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아지와 산책을 해 본 사람은 안다. 보폭을 맞춰 걷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말 못하는 강아지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보폭을 맞추는 게 더 어렵다.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대처 방법에서 이견을 보이기 때문이다. 강아지야 내가 억지로 끌고갈 수도 있지만, 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과는 방향성으로 인해 수많은 다툼을 벌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녀와의 연애를 평범한 게 아닌 특별한 것이라 생각하게 된 걸까. 

 

문제는 희생이다. 어떤 희생은 연애의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어떤 희생은 오히려 해가 된다. 부대찌개를 싫어하는 미진이 눈치를 보느라 2년간 한 번도 부대찌개 집을 가지 않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연애방식을 무조건 그녀에게 맞추려 했던 건 문제가 됐다. 우린 연애의 보폭이 많이 달랐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나의 보폭을 맞추려 했을 거고, 나 역시 그녀의 보폭을 맞추려 무던히 노력한다고 생각했었다. 우린 서로의 노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본인 노력의 가치에만 몰두했다. 평범할 수도 있었던 연애를 특별한 연애로 바꿔 버린 것. 그렇게나 꿈꾸던 4번 형태가 될 수도 있었던 우리의 연애를 2번쯤으로 바꿔 버린 건 미진이가 아니라 내 문제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희생 정도가 비슷하다 여겼다면 굳이 나 혼자만 특별한 희생을 하고 있단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그날의 사건만은 그녀의 문제가 컸다. 이제 와서 얘기하지만, 문제는 사실 따로 있었다. 막 생겨난 애칭을 서로 불러가며 기분 좋게 들떠 있던 술자리의 말미. 잔뜩 취한 상태의 미진이가 옛 남자친구 이야길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속에 도무지 참기 힘든 사실이 있었다. 내게 아낌없이 불러 달라던 미진이의 애칭이, 사실은 옛 남자친구와 주고받던 애칭이었단 것이었다. 

이별소화레시피

이별이 두려워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별은 실패가 아니다. 분명한 성장이다. 정확히는, 그 끝이 이별이라 할지라도 연애는 사람을 성장시킨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채는 센스도 조금 생긴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 중 도무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회피하는 방법도 배우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억지로 상대에게 강요했을 때의 후폭풍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게 된다. 종합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취향의 확인 이라는 첫 번째 성장, 그리고 그 취향을 양보와 희생할 수 있게 하는 두 번째 성장을 이룬다는 점이다. 그러니 연애는 되도록 많이 해 보는 게 좋다. 허무함이란 부작용만 최대한 조심한다면. 

맛집정보 : 파티오D 가로수길점 / 02-511-1042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로8길 12 타래하우스텔
오늘의 실시간
BEST
yoyolove
채널명
김정훈
소개글
불만보단 불안을 즐깁니다. 요즘남자요즘연애 [소담]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