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을 알아 새로운 것을 알아냄
논어 1장 학이편
자공이 말하길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되 즐거우며,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는 자보다는 못하다.”라고 하셨다. 자공이 말하길 “『시경詩經』에서 ‘잘라 놓은 듯 곱게 갈아 놓은 듯하며, 쪼아 놓은 듯 갈아 놓은 듯하구나!’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賜야, 비로소 더불어 『시경』을 논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고해주니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알아내는구나!”라고 하셨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공자에게는 자공(子貢)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자공은 머리가 아주 좋았지만 공자의 다른 제자인 안자(顔子)를 따라잡지는 못했습니다. 자공이 아이큐가 높았다고 한다면, 안자는 영성지능이 높은 분이었죠. 자공은 앞일을 예측하고 투자하는 데에 뛰어났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공자가 전국을 여행하는 비용을 자공이 많이 지원했다고 합니다. 또 공자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3년 상을 마치고 나서 3년 상을 한 번 더 해서 모두 6년 동안이나 공자의 묘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자공이라는 제자는 머리나 말이 앞서고 행동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자가 공자로부터 늘 칭찬만 들은 반면, 자공은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도 공자에게는 머리가 너무 앞서는 자공이 불안해 보였을 것입니다. 머리가 좋으면 스승의 말을 다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이 금방 확충되는데, 행동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영성이 기형적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실천은 못 하고 있는데, 마치 자신이 다 이룬 것 같은 기분에 빠지는 것이죠. 그래서 공자가 자공을 견제하는 말을 많이 했는데 여기에서는 크게 칭찬을 했습니다. 자공이 왜 칭찬을 받았는지 한번 보실까요?
자공이 말하기를,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자공이 공자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어서 살짝 자기 얘기를 돌려서 한 것 같습니다. 자신은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은데, 이 정도면 공부가 좀 되지 않았느냐고 물은 것이죠. 하지만 공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가볍게 눌러버립니다. “可” 한자로 가(可)는 그 정도면 옳다, 큰 하자는 없다는 정도의 표현입니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가난하되 즐거우며,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는 자보다는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하되 즐겁다는 것은, 가난하더라도 도道를 즐기기 때문에 즐겁다는 의미입니다. 가난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양심을 알아가고 그 양심의 발현을 닦아가는 기쁨이 너무 커서, 먹을 것, 입을 것이 시원치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즉, 도가 너무 즐거우니까, 가난해도 즐거운 것입니다.
그리고 부유해도 예절을 좋아하는 사람은, 부자이면서도 양심을 늘 표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절이라는 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을 실제로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에게 깍듯하고, 배려도 잘하고, 실제로 양심을 실천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것이죠.
이 말을 듣고 자공이 실망했을 법도 한데, 물러나지 않고 다시 묻습니다. “『시경』에서 ‘잘라 놓은 듯 곱게 갈아 놓은 듯하며, 쪼아 놓은 듯 갈아 놓은 듯하구나!’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 뭔가를 자르고 다시 곱게 갈고, 또 쪼아놓고 다시 간다는 것은 이중 작업을 말합니다. 우리가 돌멩이 하나를 잘라서 쓴다 하더라도 그 자른 곳을 곱게 갈아야 합니다. “제가 얘기한 건 자른 격이라면, 공자께서 말한 건 그걸 다시 한 번 더 곱게 갈은 격이군요!”하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시경』의 구절인데요. 공자가 이 말을 듣고 크게 칭찬합니다. 자공의 이름인 사賜를 부르며, 비로소 더불어 『시경』을 논할 만하다고 한 것이죠. 그러고는 지나간 것을 이야기해줬더니,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알아냈다면서 칭찬해줍니다. 자공이 “나는 공부가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그걸 또 정밀하게 다듬어야 하는군요!” 하고 말해서 비로소 공자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죠.
자공은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데, 공자의 중요한 말씀들이 자공의 질문을 통해서 많이 나옵니다. 한번은 자공이 공자의 핵심사상을 알아내려고, “공자님, 한 글자만 얘기해주세요. 제가 평생 지키겠습니다.” 하고 청하니, 공자께서 “서恕”라고 하셨습니다. 용서할 서자죠. 그러고 나서 말하기를, “네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자공이, “저는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니 “자공아, 그건 네가 감당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자공이 자신의 행동에 비해 말이 너무 앞서니까 스승의 입장에서 단속해 준 것이죠. 공자의 제자 중 안자만이 배운 것을 온몸으로 구현했기 때문에 안자는 늘 칭찬을 받았습니다. 공자가 말하면 진짜로 해버리거든요. 공자도 처음엔 의심을 해서 “안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다 “예!”만 하니 마치 바보와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 배우고 돌아가서 어떻게 하는지를 은밀히 살펴봤더니 말한 그대로 하고 있었다. 안자는 바보가 아니다.”
학문은 결국 오타쿠의 정신이에요. 그리고 공자는 그런 학문의 오타쿠였어요. 공자가 보기에 다른 제자들은 뭔가 즐기는 것 같은데 즐기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본인은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공자의 눈에는 별로 즐기는 것 같지 않아 보여서 불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공자가 발견한 진정한 학문의 오타쿠는 안자였던 것입니다.
"우리 안자는 안자고 뭐하니?" "앗, 스승님!" (삽화: 차망우인) |
공자의 진정한 후계자였던 안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공자의 심법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게 됩니다. 학문의 근본이 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연구와, 양심을 계발하는 방법에 대한 심도 있는 자료들이 풍부하게 전해지지 않게 된 것이죠. 그래서 공자 학파의 흐름이 주로 세상을 경영하는 경영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공자의 손자인 자사와 자사의 제자인 맹자가 다시 많이 보강을 해 놓아서 큰 핵심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