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와 절제
논어 1장 학이學而편
유자가 말하기를 “예절을 쓸 때에는 ‘조화’(和)를 귀하게 여긴다. 선왕의 도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기니, 크고 작은 모든 예절이 이로 말미암았다. 그러나 절대로 행해지 않을 것이 있으니, 오직 조화만 알고 조화만을 추구하여 예절로서 ‘절제’(節)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공자의 제자인 유자가 말하기를 “예절을 쓸 때에는 조화가 귀하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조화’(和)란 ‘벼’(禾)를 ‘입’(口)에 물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조화로운가요? 농사를 지어서 얻은 수확물을 서로 나누어 먹으며 함께 즐거워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가슴에 맺혔던 한(恨)도 모두 풀리고 마음이 여유로워지겠지요. 그게 바로 조화입니다. 그래서 예절에는 조화가 참 귀하다고 말한 것이죠. 예절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서로를 배려하고 조화롭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까요.
예절(禮節)은 5행 중에서는 ‘불’(火)의 덕목이고, 계절로는 ‘여름’의 덕목입니다. 여름에는 만물이 자기 안에 있던 것을, 훤히 타오르는 불처럼 밖으로 표현합니다. 겨울에 씨앗으로 존재하던 것이 여름이 되면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꽃이 되어 자신의 속을 완전히 드러내죠. 그런데 만약 ‘조화’가 없이 각자대로 자기표현만 중시한다면 전체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서로를 배려해가면서 자기 소리를 내야만 전체적인 하모니가 이루어지니까요.
그래서 유자는 ‘선대 왕’의 도는 조화를 귀하게 여겼으니, 크고 작은 예절들은 모두 조화를 이루기 위해 제정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선대의 왕이라면 옛날 왕들인데, 유교경전에서 선왕(先王)은 단순히 옛날 왕이 아니라, 선대의 왕들 중에서 양심적인 왕만을 의미합니다. 연산군 같은 임금은 선왕이라고 칭하지 못하는 것이죠. 후대에 모범이 될 만한 왕, 즉 양심적인 왕들만이 선왕으로서의 자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고대의 전설적인 훌륭한 왕으로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꼽는데, 모두 양심의 달인이면서 천자까지 되신 분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왕 중에서는 세종대왕 같은 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모든 예절이 모두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나왔다고 한 것은, 한 나라에서 예절을 지키고, 한 가정에서 예절을 지키는 것이, 결국 그 나라와 가정을 더 화목하고 조화롭게 하고자 함이라는 뜻입니다. 예절이 단순히 군기나 잡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유자는 오직 ‘조화’만 중시하면서 서로 ‘절제’를 하지 않으면, 또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절에는 조화가 중요지만, 그 안에 반드시 절도나 절제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절이 본래 조화를 추구하지만, 절제를 잃어버리면 크게 방탕해지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으니까요.
절제 없는 친절이 낳은... (삽화: 차망우인) |
‘절제를 한다는 것은 단속한다는 의미인데, 행동을 적정선에서 끊어 주어야 절제가 됩니다. 더 나아가면 과하고 그만큼 못 미치면 부족한 선을 잘 알아서, 적정선에서 끊어주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절제입니다. 이렇게 서로 적정선을 지킬 때 조화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절제가 있어야 조화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죠.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을 엄격히 지켜야만, 서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유교에서는 공자 이래로 ‘예악禮樂’이라고 해서, ‘예절’과 ‘음악’을 함께 강조해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절제와 조화가 모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예절에 있어 조화의 측면을 도와줍니다. 상호간의 예절을 엄격히 강조하는 군대에서도 군가를 중시하죠. 예절로 엄격하기만 해서는 마음이 제각기 찢어져 서로 분열이 되거든요. 그래서 장교로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마음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음악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깍듯한 절제만 강조하다보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도 깍듯한 예절만 강조하여 임금 앞에서 누구도 고개를 못 들게 만들면, 백성과 임금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죠. 그때 음악을 연주하면서 그 음악을 함께 즐기는 중에 다시 한마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를 할 때에도, 사람의 마음을 경영할 때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적정선을 정해 놓되, 음악을 통해서 모든 벽을 넘어 한마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 즉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음악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한자에서는 ‘음악’을 ‘즐거움’을 의미하는 ‘낙樂’자로 쓰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모든 벽을 넘어 한마음을 만들어 주는 음악의 기능을 잘 알고 활용한 것이죠.
오감 중에서는 ‘소리’가 우리 마음을 가장 쉽게 변화시킵니다. ‘색깔’도 눈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소리’는 감정에 보다 직접적으로 파고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절한 음악을 조금만 들어도 바로 슬퍼지는 것입니다. 종교, 명상, 치유 등 마음을 다스리는 분야에서 특히 음악이 많이 활용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힘찬 음악이 들려오면 우리 마음도 함께 들썩이고, 슬픈 음악이 들려오면 우리 마음도 금방 애처로워집니다. 마음이 애절해지면서 온갖 슬펐던 사연들이 다 떠오르게 되죠. 그러니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에는 음악을 활용하면 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해 놓았다가 감정에 따라 골라 들으면서 몰입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수단이 바로 ‘음악’이니까요.
각자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만 표현하면서 ‘절제’가 없다면, 사람이 조금만 모여도 금세 난리가 나고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모두를 위해 예절의 한계를 정해놓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 선을 넘지 마라.” 이런 기준이 있으면 서로가 편해집니다. 나는 그 안에서만 판단해서 행동하면 되고, 서로 간에 책임이 분명해지니까 편해지는 것입니다. 딱 그 선까지만 해주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쪼개지다 보면 전체의 마음까지 쪼개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조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결국 절제라는 것도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한 도구입니다. ‘음악’을 활용한다면 더욱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역지사지하고 배려해주면서 공감해주게 되면 자연스럽게 ‘한마음’이 됩니다.
조화는 본래 “같이 즐겁자!”는 것입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더불어 즐거워하는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한번 같이 나누어 먹어야 서로 한마음이 되거든요. 예절에는 절도가 중요하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이런 조화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예절은 남과 조화를 이룰 수 없고 살벌한 형식만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