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기쁨과 나누는 즐거움
논어 1장 학이學而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방문하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 답지 아니한가?”라고 하셨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성인(聖人)을 요즘 식으로 재미있게 표현하면 ‘양심 오타쿠’ (삽화: 차망우인) |
논어 1장 학이(學而)편 1절입니다. 이 구절은 아마도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배우는 기쁨과 나누는 즐거움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인(聖人)을 요즘 식으로 재미있게 표현하면 ‘양심 오타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양심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공부를 진심으로 즐기는 분들인 것이죠. 그리고 그런 오타쿠들의 특징은 그 기쁨을 남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오타쿠는 특정 영역의 즐거움을 더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무엇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히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대답을 못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반면, 오타쿠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고, 그것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과해서 심한 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오타쿠가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에 몰입하는 긍정적인 오타쿠가 있는데, 그런 일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분들은 역사적으로 큰 위인이 됩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논어의 다른 구절에서 스스로에 대해, “나는 공부에 한번 미치면 배고픈 것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늙는 줄도 모른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공부의 즐거움 때문에 이런 삶의 기본적인 것들을 다 잊는 정도라면, 이분은 정말 심한 오타쿠이셨겠지요.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들도 모두 양심의 오타쿠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에 몰입하여 즐기는 오타쿠들도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는데, 양심을 아주 정밀히 파신 분들은 그 즐거움을 얼마나 나누고 싶을까요? 그분들이 연구한 다양한 정보와 진리를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실 것입니다. 양심 오타쿠는 공유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공자께서는, “나는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나는 배우는 것에 싫증 내지 않았고, 양심을 공부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쳐 주는 데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즐거움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어 하는 공자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즐기는 마음은 ‘자리’(自利), 즉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그렇게 얻은 진리를 남에게 가르쳐 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이타’(利他)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자리이타’(自利利他)와 공자님의 태도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요즘 페이스북이나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입니다. 정보를 얻는 데에 싫증을 내지 않고, 그 정보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남과 공유하고 알리는 데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잠을 덜 자고서라도 밤에 정보를 올리는 분들도 계시죠. 여기에 본인의 명예욕이나 다른 욕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근원에는 이 정보를 남들이 알면 정말 좋겠다는 순수한 양심적인 동기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양심을 정밀히 파신 분들은 그 동기가 더욱 순수하겠지요? 이런 순수한 동기를 대아적 욕망인 ‘원’(願)이라고 합니다.
위 구절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남으로부터 진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움의 시작을 혼자서 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부처님도 지혜를 얻는 방법으로서 ‘문사수’(聞思修)를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먼저 진리를 듣고(聞), 혼자 생각해 보고(思), 그 다음 실천해 보라는(修) 내용입니다. 공자님도 이와 마찬가지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듣고, 때때로 혼자 직접 실천해 보면서 익히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배움의 주제는 ‘양심’입니다. 공자께서는 본인이 평생 공부한 것은 ‘서’(恕, 용서할 서)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용서할 서’자는 ‘같을 여’(如)자와 ‘마음 심’(心)자가 합쳐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와 남을 같게 보는 마음을 뜻합니다. 즉,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황금률’과도 통합니다. 즉, ‘양심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자님은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만 평생 연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에는 도반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만 느끼는 공부의 재미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진리도 남과 나누었을 때 그 즐거움이 더 커집니다. 또 내가 모르는 새로운 관점을 도반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어느 한 분자의 입장에서 우주를 보기 때문에 항상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개체들의 눈에는 우주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없는 것이죠. 그러니 서로 얘기를 나누어 봐야 합니다. 특히 같은 도道를 닦는 사람들끼리는 대화를 나누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도를 더 정밀하게 이해하고 체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반들끼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찾고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멀리서 온 도반과 밤새 이야기하고, 스스로 각자 공부한 것을 나누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자신이 얻은 진리를 서로 나누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 안에 ‘수기修己’(자신을 닦음)와 ‘치인治人 ’(남을 도와줌)이 있고, ‘자리自利’(나를 이롭게 함)와 ‘이타利他’(남을 이롭게 함)가 있으니, 이미 군자이고 보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교의 군자가 불교에서는 보살입니다. 군자는 나를 닦아서 남을 다스려 주려는 존재이고, 보살은 나를 닦아서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을 보겠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학문의 즐거움을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서러워한다면 군자가 아닙니다. 남이 당장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와 남 모두를 위해 양심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으면, 그 자체에서 오는 희열로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속상함과 비난을 받는 억울함보다, 내가 양심을 밝히며 다른 사람들까지 잘 살 수 있게 인도하는 작업에서 오는 희열이 더 큰 것이죠. 배움의 기쁨과 나누는 즐거움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기쁘고 즐거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윤홍식의 인문학 강의]논어 1장 학이學而편 1-1배움의 기쁨과 나누는 즐거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