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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산·보석 같은 암자…내설악과 오세암

남한 제일 명산 설악에 안긴 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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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에서 바라본 용아장성[사진/백승렬 기자]

'우리가 가는 곳 그 모두가 고향인데/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흰 눈 위로 붉은 복사꽃이 흩날린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의 오도송이다. 오도송이란 고승이 부처의 도를 깨닫고 지은 선시 혹은 시가를 말한다. 만해는 출가한 지 10여 년 되던 1917년 12월 깊은 밤 내설악 오세암에서 참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순간에 득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거인의 자리·그리움 맺힌 대자연…오세암

남한 제일의 명산 설악이 품은 대표적 사찰 백담사의 부속 암자인 오세암은 백담사에서도 6㎞가량 더 들어간 산중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 산악 비경의 최고봉을 이루는 공룡능선으로 이어지는 마등령을 이고, 웅혼한 기상을 내뿜는 용아장성과 만경대를 호령하듯 내다보고 있다. 이른바 '기도발'이 가장 세다는 봉정암, 공룡능선, 백담사를 오르내리는 산객들의 발걸음이 교차하는 길목에 위치한 오세암은 여름밤에도 서늘했다. 세상을 얼어붙게 할 듯 춥고 캄캄한 한겨울 밤, 하얗게 빛나는 눈밭에 흩어지는 복사꽃잎처럼 만해에게 진리는 아름다웠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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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스님 흉상과 '나룻배와 행인' 시비[사진/백승렬 기자]

백담사와 오세암은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시인이었던 만해에게 정신적 고향이었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17세에 설악산에 들어가 오세암에서 머슴으로 일했다.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한 뒤 1910년 불교개혁이론으로서 지금도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선생은 강직했다. 최남선 등 친일 변절자들을 면전에서 꾸짖고, 옥살이 중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감방 내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똥물 세례를 퍼붓는가 하면, 남쪽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다며 집을 북향으로 앉혔다.


선생은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시는 한없이 부드럽고 애틋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님의 침묵' 중)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그러나 나는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나룻배와 행인' 중) 오세암으로 오르는 길에 수행 중인 무연 스님과 등휴 스님을 만났다. 


오세암 산감 스님인 무연은 만해의 시가 힘을 갖는 것은 올곧았던 그의 삶이 시를 뒷받침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동자승 같은 맑은 눈매의 등휴 스님은 참된 '나'는 내 속에 있으므로 찾기만 하면 된다며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므로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짧지만 명료한 법문을 선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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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의 아침[사진/백승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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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에 앞서 오세암에 머문 거인은 또 있었다. 조선 초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던 생육신 중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1455년쯤부터 오랫동안 오세암에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김시습전'을 썼던 율곡 이이는 그를 일컬어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랐다"고 평했다. 다섯 살에 세종으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았던 김시습은 '오세신동'으로 불렸는데 오세암의 이름이 그로부터 유래했다는 설명이 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 시대에 일시적이나마 불교 부흥을 이끌었던 보우 선사(1509∼1565)도 오세암에서 수도했다.


신라 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오세암에는 큰 인물들이 체류하거나 거쳐 갔지만 산속 깊숙이 숨은 이 암자가 현대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동작가 정채봉의 동화 '오세암'과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 만화영화 덕분이다. 작중에서 다섯 살 소년과 그의 눈먼 누이는 고아이다. 우연히 알게 된 스님 덕분에 오세암에 머무는 남매는 설악의 숭고한 자연 속에서 엄마를 그리워하고, 소년은 앞 못 보는 누이에게 세상 존재들을 느끼게 해주려고 애쓴다. 다섯 살 아이가 폭설 갇혀 홀로 암자에 남아 있다가 관음보살의 보살핌을 받아 득도한다는 오세암 전설에 이 이야기는 기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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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등령에서 바라본 공룡능선[사진/백승렬 기자]

◇ 산인을 부르는 공룡능선·간절함의 표상 봉정암

오세암은 백담사에서 마등령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다. 등산객을 매혹하는 설악산 공룡은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분수령인 마등령에서 무너미 고개까지 이어지는, 험난한 암봉이 연속된 약 5㎞의 능선을 일컫는다. 공룡 등뼈를 연상시킬 만큼 바위 봉우리들이 거칠고 뾰족뾰족할 뿐 아니라 깎아지른 듯 수직으로 높이 솟아 숙련된 산악인들이 아니면 오르기 어렵다. 이 능선에 올라 바라보는 경치는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호쾌하고 장엄해 등정은 산꾼의 '로망'으로 꼽힌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봉정암은 국내 사찰 중 가장 높은 곳(해발 1,244m)에 자리 잡고 있다.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이 굴기한 산중에 자리한 봉정암은 백담사에서 바로 가거나 오세암을 거쳐서 갈 수 있는데 가파른 경사로 인해 산행길이 몹시 힘들다. '깔딱고개'로 불리는 마지막 0.5∼1.6㎞는 기어서 올라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닿기 어려운 곳일수록 이르고자 하는 집념은 강해지는가. 평생에 한 번은 가야 할 순례지로 봉정암을 꼽는 불자가 적지 않다. 봉정암을 완등하는 신자 중에는 등허리가 굽은 할머니와 무릎 관절이 아픈 환자도 꽤 있다. 소망의 간절함이 기적의 열쇠가 아닐까 생각게 한다. 돌아간 성철스님은 친견을 원하는 불자들에게 먼저 3천 배를 시킨 뒤 만나 주었다. 이를 두고 그는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신도들에게 절실한 기도의 효과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극진한 정성에는 자신을 이기는 동시에 외적 고난을 뛰어넘게 하는 힘이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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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에서 오세암 가는 길[사진/백승렬 기자]

◇ 설악의 삼보(三寶)

오세암과 봉정암을 관할하는 본찰이 백담사이다. 백담사 소속 암자 중 영시암도 내설악의 빼놓을 수 없는 명찰이다. 조선 후기 최고 학자로 추앙되는 김창흡이 영원한 은거를 맹세했던 곳이다. '영시'는 시위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화살을 뜻한다. 나그네에게 발걸음을 멈추고 절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허공에 이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듯 영시암에서 흘러나오는 염불은 그윽하게 설악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으로 인해 설악산은 삼보(三寶)를 갖췄다는 신앙적 믿음이 생겼다. 삼보란 부처, 부처의 가르침, 그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들인 승가를 지칭한다. 백담사에는 조계종 승려 교육기관인 기본선원이 있다. 6·25 전화로 소실되긴 했으나 팔만대장경 인쇄본이 1865년 오세암에 봉안됐었다. 봉정암의 부처 진신사리, 백담사 선원, 오세암 팔만대장경이 삼보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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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계곡 돌탑[사진/백승렬 기자]

영시암 앞을 흐르는 수렴동 계곡은 백담사 앞을 지나며 백담 계곡을 형성한다. 목조아미타불, 백담 계곡에 걸쳐진 수심교, 만해기념관은 안 보고 지나치면 아까운 백담사의 보물들이다. 아미타불좌상은 조선 영조 24년(1748)에 제작됐다. 길고 아름다운 수심교는 내설악의 중첩된 산군을 한눈에 품게 하는 조망 포인트이기도 하다. 다리 밑 계곡에는 수백, 수천 년 풍화와 침식에 부서지고 마모된 작은 돌들이 밭을 이루고, 그 밭에는 서원으로 쌓아 올린 돌탑들이 빽빽하다. 


템플 스테이 참여자들은 해 질 녘, 계곡에 발을 담근 채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에 취해 있었다. 눈길은 봉정암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를 깊은 산중 어느 곳, 흰 구름 흘러가는 아득한 하늘 어느 지점을 향해 있었다. 1988년 이곳에 유배됐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쓰고 남긴 물건들인 옷가지, 이불 등의 전시품에도 탐방객들은 눈길을 주었다.


백담사는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좀처럼 찾기 힘든 수행처였다. 계곡 입구에서 8㎞를 걸어 들어가는 오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방문객이 늘어난 것은 전 전 대통령 유배로 백담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이후부터이다. 셔틀버스가 다니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보행자용 데크 길이 놓이고 차도에 아스팔트가 깔리면서 계곡을 감상하며 걷기가 좋아졌다. 백담의 쉼 없는 맑은 계류는 역사의 과오와 비극이 더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민족의 간절한 여망을 안고 흐르는가.


현경숙 기자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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