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이 전해준 곡물 '메밀'…국내 최대 생산지는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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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 삶과 뗄 수 없는 주요 곡식…신화와 연계한 관광 콘텐츠화 시급
제주 무속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자청비.
제주는 메밀꽃 필 무렵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21일 오전 제주시 오라동 중산간 메밀밭에 메밀꽃이 활짝 피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2020.10.21 jihopark@yna.co.kr |
자청비는 노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딸이었다.
사랑을 찾아 불구덩이도 마다하지 않는 용기와 온갖 역경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를 갖춘 덕에 자청비는 대지를 관장하는 사랑과 농경의 신이 된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의 특성상 이야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자청비가 여신이 되는 과정을 담은 제주 농경 신화 '세경본풀이'를 보면 제주 농경의 시작과 제주의 중요한 효자 곡물이 된 메밀의 사연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신화 속에서 자청비는 하늘 옥황(玉皇)의 문도령과 만난 뒤 남장을 하고 글공부를 하러 떠나 문도령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결국 이별하게 된다.
이후 문도령을 찾기 위한 자청비의 모험이 시작된다.
자청비는 자신을 사모하던 남자 노비로부터 겁탈을 당할뻔하기도 하고, 어렵게 문도령과 만나 혼례를 하지만 문도령은 하늘 옥황 선비들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농경의 여신 자청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
자청비는 서천꽃밭의 환생꽃과 멸망꽃을 따다가 문도령을 살리고, 하늘의 난리를 막는 등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된다.
하늘 옥황의 천지왕은 하늘의 기름진 땅과 구름 같은 꿈의 땅 등을 나눠주겠다며 하늘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자청비는 끝내 거절한다.
자청비는 "하늘님아 부디 상을 내리시겠다면, 제주 땅에 내려가서 심을 오곡의 씨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간청한다.
자청비는 여러 가지 곡식 종자를 얻어서 땅으로 내려와 농경의 신이 돼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짓도록 돕는다.
그런데 자청비는 한 가지 잊고 온 씨앗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랴부랴 하늘에 다시 올라가 씨앗을 가져오니 그것이 바로 '메밀'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메밀 씨를 다른 씨보다 늦게 뿌린다고 한다.
제주 메밀꽃 '활짝' [연합뉴스 자료사진] |
제주인의 삶과 밀접한 메밀
메밀은 예부터 겨울에 나는 중요한 제주의 음식 재료다.
여신 자청비가 하늘에서 늦게 가져온 덕분일까.
사람들은 메밀을 다른 잡곡보다 늦게 파종하더라도 수확할 수 있었다.
제주에서는 비교적 해발이 높은 곳에서 처서(8월 23일경) 무렵에 메밀을 파종, 상강(10월 23일경) 이후에 거둬들였다. 반드시 윤작을 위해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중순 이전에는 수확을 끝내야 한다.
추위에 강하고 생육 기간이 짧을 뿐만 아니라 이모작이 가능한 잡곡이기 때문에 논농사가 거의 없는 밭농사 위주의 제주에선 없어선 안 될 작물이다.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물 대신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이란 뜻의 '구황작물'에 딱 들어맞는 작물이다.
메밀의 쓰임새는 놀랍다.
제주 빙떡 [연합뉴스 자료사진] |
우선 제주가 메밀음식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제주에선 메밀로 만드는 음식 가짓수가 많다. 메밀밥, 메밀죽, 메밀범벅, 메밀수제비, 메밀묵, 빙떡, 돌레떡 등 정말 다양하다.
제주 향토음식점에서 맛보는 'ㅁ+ㆍ+ㅁ국'(정확한 아래아 발음은 아니지만 '몸국' 정도로 발음), 고사리 육개장의 걸쭉한 느낌은 메밀가루 덕분이다. 국물에 메밀을 넣어 맛을 한층 더 풍부하고 좋게 만드는 것.
특히, 명절이나 제사·혼례·상례 등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상에 올리는 음식이 바로 메밀로 만든 빙떡이다.
제주에서는 산모에게 메밀로 한 음식을 먹였다. 출혈을 멎게 해준다, 부기를 빼준다, 모유가 잘 나오게 해준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어서다.
메밀껍질은 찬 성질이 있어서 머리의 열을 낮춰준다. 머리와 목덜미를 잘 받쳐줘서 베갯속으로 활용한다. 예부터 신생아나 아이 베개로 많이 사용했다.
메밀은 제주 사람들에게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중요한 음식이자, 의례의 제물로 제주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메밀에는 제주 사람들의 신화와 역사, 문화가 고스란히 담겼다.
여성 제관이 올리는 제례 (제주=연합뉴스)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열린 '설문대할망제'에서 미국인 마샤 보고린(앞줄) 국제영성지도력센터 이사가 제주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인 '설문대할망(할머니)'을 기리며 메밀과 콩, 제주쌀 이삭을 제단에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메밀 생산 1위 제주…자청비 여신 콘텐츠화 시급
제주에서 메밀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생산량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국내 메밀 생산량과 재배면적 1위는 제주도다.
지난 10년간 통계청의 잡곡 생산량 자료를 보면, 제주의 메밀 재배면적과 생산량은 2010년 680㏊에 612t(전국 생산량의 31.3%), 2013년 848㏊에 500t(26%), 2016년 1천382㏊에 263t(13.9%), 2019년 1천107㏊에 974t(36.0%) 등 2016년을 제외하고 언제나 전국 생산량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생산량만 놓고 보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메밀밭 명소가 있는 강원도의 경우 제주도 생산량(974t)의 약 1/5 수준인 175t에 불과하다.
메밀꽃은 제주의 대표 관광자원으로 거듭났다.
메밀꽃은 9월에 꽃망울을 터뜨려 10월까지 순백의 자태를 뽐낸다.
제주 하면 대개 유채꽃이나 벚꽃을 떠올리지만 제주 섬 곳곳을 하얗게 물들이는 메밀꽃은 가을을 대표하는 제주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제주의 대표 메밀꽃 명소로 유명한 제주시 오라동 중산간 대지는 남쪽으로는 한라산과 오름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바다와 제주시 내 풍광이 메밀꽃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제주 중산간은 메밀꽃 천국 [연합뉴스 자료사진] |
오라동에서는 지난 2016년부터 매년 메밀꽃 만개 시기에 맞춰 '오라동 메밀꽃 축제'를 개최해왔지만,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개최하지 않았다.
이처럼 생산량도 많고 제주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는 메밀이지만, 제주가 메밀 주산지로 알려지지 못한 이유를 사람들은 스토리텔링의 부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봉평의 경우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박힐 지경이다"라며 메밀꽃밭을 아름답게 묘사한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모티브로 메밀꽃이 절정을 이루는 9월 초순께 평창 효석문화제를 여는 등 이미 관광 자원화 돼 있다.
하지만 제주는 농경의 신 자청비가 하늘에서 갖고 내려온 곡물 중 하나로 메밀이 등장하는 등 소재가 풍부하지만 이를 제대로 관광 자원화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로마 신화 등 다른 나라나 민족의 신화는 잘 알면서도 정작 우리 제주 신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설문대할망이 만든 제주 땅에 하늘의 곡물을 가져와 농사를 짓도록 도우며 땅의 질서를 세운 여신 자청비의 이야기를 알리고 콘텐츠화하는 등 문화·관광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 이 기사는 '할망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음식이야기', '제주 생활사' 책자와 '문무병의 제주, 신화' 연재물 등을 참고해 제주 메밀을 소개한 것입니다.]
탐라문화제, 메밀 일소리 |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b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