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도 없는 12폭포의 비경, 내연산
거친 수직 암벽과 어우러진 현란한 물줄기
마침내 싱그러운 여름이다. 여름 진경은 시원하게 부서지는 폭포의 하얀 물줄기 아닐까. 포항 내연산에는 14㎞에 이르는 계곡을 따라 폭포가 열두 개나 있다. 수백 m 높이 기암절벽을 양옆에 두고 다양한 형태의 폭포가 만들어내는 절경은 금강산에도 없는 비경이다.
내연산 12 폭포
제7 연산폭포 [사진/조보희 기자] |
조선시대 유학자 정시한(1625∼1707)은 '산중일기'에서 내연산 폭포에 대해 "기이한 경치이며 금강산에도 없다"라고 했다. 1733년 청하 현감으로 부임해 2년 동안 재임했던 겸재 정선은 '내연삼용추' 등 내연산 폭포를 소재로 한 그림 4점을 남겼다. 겸재는 진경산수화의 걸작 '금강전도'를 청하에서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하는 내연산 계곡의 옛 이름이다. 진경산수화풍이 완성된 곳이 내연산인 셈이다.
내연산 계곡은 신생대 화산지형이 빚어낸 협곡이다. 화산재가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형성했다. 절벽은 '깎아지르다'라는 표현이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직벽의 거대한 바위였다. 작은 것은 수십m, 큰 것은 100∼300m 높이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선일대 [사진/조보희 기자] |
선일대(仙逸臺), 비하대(飛下臺), 학소대(鶴巢臺) 등이 특히 이름난 암벽이다. 암벽 밑에는 맑은 물이 세차게 흐르고,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와 못, 소(沼), 담(潭) 등 푸르고 깊은 물웅덩이가 형성돼 있다. 급류에 침식된 암벽 하단부에는 여기저기 동굴이 패여 있다. 제6 관음폭포 부근에는 얼핏 봐도 3∼4개의 깊은 동굴이 만들어져 있었다. 동굴화가 진행 중인 곳은 더 많았다.
흔치 않은 협곡인 내연산은 그윽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국립이나 도립이 아니고, 군립 공원에 지나지 않아서일까. 행정구역상 옛 영일 군에 속했던 내연산은 옛 영일 군이 포항시에 통합되기 전에 군립 공원으로 지정됐다.
산악인 중에는 '설악보다 내연'이라는 예찬가도 적지 않다. 내연산은 경북 8경으로 꼽히며 경북 3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내연산은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 있는 높이 930m의 웅장한 산이다. 낙동정맥이 울진 통고산, 영덕 백암산, 청송 왕거산으로 내려오다가 동해안으로 뻗어 똬리를 틀었다.
내연산은 주봉인 향로봉(930m)을 비롯해 삼지봉(710m), 문수봉(622m), 매봉(833m), 삿갓봉(716m), 우척봉(775m) 등 6개 봉우리를 갖고 있다. 해안가의 낮은 산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삼지봉을 주봉으로 착각한 때문인 것 같다.
내연산 계곡 [사진/조보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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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연산을 이틀 연속 찾았고 몇 번인가 계곡을 오르내렸다. 계곡은 시시때때로 느낌이 사뭇 달랐다. 여름이어서인지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계곡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햇볕은 쨍쨍했고, 계곡물은 우렁찼다. 우르르 쾅쾅∼. 바위가 크고 못이 깊은 곳에서는 흘러가는 물소리가 대포 소리를 방불케 했다.
흐린 날 오후 계곡은 심연에 잠긴 듯 장중했다. 시시각각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산과 바다만이 아니었다. 계곡도 그랬다. 아마도 살아있는 모든 생명과 자연이 마찬가지이리라.
내연산 계곡은 길이가 14㎞에 이른다. 높이 7∼30m의 폭포가 12개다. 계곡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제1 상생폭포, 제2 보현폭포, 제3 삼보폭포, 제4 잠룡폭포, 제5 무풍폭포, 제6 관음폭포, 제7 연산폭포, 제8 은폭포, 제9 복호1폭포, 제10 복호2폭포 , 제11 실폭포, 제12 시명폭포 순으로 이어진다.
제1 상생폭포 [사진/조보희 기자] |
탐방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폭포는 제7 폭포인 연산폭포다. 이유는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다. 그만큼 연산폭포는 우렁차다. 연산폭포는 학소대라는 암벽에 폭 둘러싸여 있었다. 고개 들어 폭포를 쳐다보면 폭포와 바위 절벽, 푸른 하늘, 바위틈에 뿌리박은 몇 그루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흙이라곤 도무지 찾기 어려운 절벽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생명력 그 자체였다. 연산폭포는 쳐다보는 이를 덮칠 것 같이 세차게 쏟아진다.
폭포와 암벽 아래는 새파란 소(沼)였다. 물이 깊어서인지 폭포가 쏟아지는데도 소는 별 흔들림 없이 잔잔하기만 하다. 암벽에는 '갑인추 정선'(甲寅秋 鄭敾:갑인년 가을에 정선 다녀가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산' 못지않게 흥미로운 폭포는 여섯번째 '관음'이다. 큰 물줄기 두 개가 떨어지는 쌍폭(雙瀑)이다. 물줄기 옆과 뒤로 시꺼먼 동굴이 몇 개나 패여 있었다. 옛적 큰 스님들이 도를 닦던 곳이다.
옆에는 비하대라는 높은 수직 절벽이 버티고 있었다. 비하대 뒤쪽으로는 제8 은폭포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옛길은 무척 험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나무 데크로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계단은 암벽 위 정자인 선일대로도 이어진다. 해발 298m 암봉에 설치된 선일대에서 내려다본 협곡은 아찔했다. 협곡 건너 맞은편 절벽 위에는 '소금강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내연산은 작은 금강산이라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불렸다.
선일대와 소금강 전망대에서는 '연산', '관음' 외에도 제4, 제5 폭포인 '무풍'과 '잠룡'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바닥 철강재 사이사이로 발밑 낭떠러지가 언뜻언뜻 보이는 소금강 전망대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간담이 서늘해진다. 한여름 무더위가 한방에 사라지는 곳이다.
제11 실폭포 [사진/조보희 기자] |
내연산 계곡의 남다른 묘미는 낭떠러지, 산기슭 등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협곡의 장관이다. 열두 폭포까지 길은 몇 군데 빼놓고 잘 다듬어져 있었다. 돌을 판판하게 깔았고, 경사가 급하거나 길이 험한 곳에는 나무 데크 길과 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탐방객들은 대개 제7 연산폭포에서 하산한다. 계곡 입구인 보경사에서 2.7㎞가량 떨어진 연산폭포까지 걸으면서 계곡의 참모습을 누렸다고 느낀 뒤 하산하는 것이다. 좀 더 열성적인 관광객은 제8 은폭포까지 방문한다. 은폭포까지는 약 4㎞다.
우리는 내연산의 마력에 이끌리듯 복호 1, 2 폭포와 실폭포, 시명폭포까지 12폭포의 탐방을 마쳤다. '복호'란 그 옛날 호랑이들이 폭포 바위 위에 엎드려 쉬곤 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명'에는 '처음' '시작'의 뜻이 담겨 있다. 오래전에 화전민들이 살았던 시명리가 근처에 있다. 계곡 입구에서 시명리까지는 약 6.2㎞이다.
제11 폭포는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비단실처럼 가늘고 고와서 '실폭포'라고 불린다. 계곡 초입에서 5.4㎞ 거리인 실폭포는 먼 길을 온 탐방객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준다. 5단 폭포인 실폭포는 웅장하면서도 우아했다. 물안개가 핀 것도 아닌데, 물줄기는 섬세하고 부드럽게 보인다. 강하면서 부드러운 물이란 이런 걸까. 복호 1과 시명 폭포는 길에서 계곡 쪽으로 100∼150m가량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야 볼 수 있었다. 급경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조금 힘들 수 있겠다.
첫 번째 폭포인 '상생'은 기대를 안고 방문한 관광객에게 실망을 안기지 않았다. 규모가 꽤 큰 쌍폭이다. 제2, 3, 4, 5 폭포인 '보현', '삼보', '잠룡', '무풍'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으나 하나같이 남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다. 내연산 계곡엔 굳이 폭포라고 지칭하지 않더라도 큰 바위에서 깊은 못으로 떨어지는 현란한 물줄기가 곳곳에 많았다. 한폭의 동양화를 떠올리는 심산유곡은 내연산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내연산의 매력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두 가지 더 있다. 천년고찰 보경사와 드넓은 경북수목원이다.
유서 깊은 보국사찰 보경사
보경사 경내 반송 [사진/조보희 기자] |
내연산 계곡 탐방로는 보경사에서 시작된다. 보경사는 계곡 입구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계곡의 맑은 물은 동해로 바로 흘러가지 않고 보경사 옆으로 만들어진 인공 수로를 통해 인근 농토에 농업용수로 공급되고 있었다. 천수답이 대부분이었던 옛적 계곡물은 농민에게 더없이 소중한 자원이었을 테다.
보경사에 들어서면 굵고 늠름한 금강송들이 밭을 이루고 있다. 속세에서 성스러운 세계로 통하는 관문 같았다. 보경사의 연기설화는 이 절이 보국사찰임을 말해준다. 신라 지명법사는 602년 중국 진나라에서 팔면보경을 갖고 귀국했다. 진평왕에게 '동해안 명산에 이 거울을 묻고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략을 막고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평왕이 오색구름에 덮인 내연산 아래 연못에 거울을 묻고 창건한 절이 보경사다. 불국사 말사인 보경사는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원진국사 등 많은 고승이 중창을 거듭했다. 건물들이 다양한 시대 양식을 보여준다. 1224년 건립한 원진국사비 등 국보가 3개 있으며 적광전, 5층 석탑 등 문화재가 볼거리다. 도 지정 기념물인 수령 400년의 탱자나무 2그루, 수령 300년 느티나무, 수령 200년 이상의 반송이 번잡하지 않은 보경사의 그윽함을 더한다.
'숲속의 숲' 경상북도수목원
경상북도 수목원 내 활짝 핀 수국 [사진/조보희 기자] |
3천㏊에 달하는 경북수목원은 내연산 남쪽 줄기, 해발 650m에 자리 잡은 고산수목원이다. 수목원 자체도 큰데, 3천200㏊가량의 도유림이 다시 수목원을 둘러싸고 있다. '숲속의 숲'인 셈이다. 그만큼 숲이 넓고 생태가 잘 보존돼 있다. 수백 년 거목이 많은 게 다른 수목원과 차별화된 특징이다. 내연산 6개 봉우리 중 매봉, 우척봉, 삿갓봉이 수목원 경계 안에 있다. 해발 730m에 위치한 전망대인 영춘정에서 맑은 날 동해와 호미곶을 볼 수 있다.
생태숲 탐방로는 등산로를 통해 내연산 계곡으로 연결된다. 수목원은 울창한 원시림이 잘 보존된 데다 동해를 바라볼 수 있고 내연산 계곡으로 통해 등산객들에게 인기다. 수목원은 탐방로를 개방하고 있다. 울릉도·독도 식물원, 희귀식물원, 고산식물원, 식약용식물원 등 24개 분원과 유아숲체험원, 생태체험관, 숲문화시설 등이 만들어져 있다. 국내외 수종, 경상북도 향토 고유 수종을 수집, 보존하고 있으며 식물유전자원 연구를 한다.
(포항=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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