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세상은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 나아진다”
<월간 채널예스> 2020년 7월호 『철도원 삼대』
『철도원 삼대』 주인공 이진오는 이십오 년 동안 공장 노동자로 일해 온 노동자이다. 공장이 폐쇄되고 회사가 다른 회사로 팔리면서 졸지에 일터가 사라진 상황, 그는 공장 건물의 굴뚝 위에 올라 농성을 시작한다. 하늘도 땅도 아닌 경계에서 삼대에 걸친 윗세대의 환상이 보이고, 그 속에는 끊임없이 “같이 좀 살자”고 외쳤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 이야기는 황석영 작가가 1989년 평양에서 평양백화점 부지배인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대를 이어 철도원으로 일했던 부지배인의 경험은 황석영 작가의 경험과 맞물려 근대와 현대를 잇는 거대한 열차의 서사로 바뀌었다.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서사
기차에 대한 이야기로 출간 간담회를 열었다가 막상 기차를 못 타서 간담회에 오지 못하셨다고요. 기자들 입장에서는 화났을 법도 한데, 대체로 기사가 호의적으로 났어요.
그 다음 주에 다시 간담회를 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신문사 경향에 따라 자기하고 경향이 맞지 않으면 비꼬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대부분 호의적이고 반가워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고맙게 생각하죠. 신세대 기자들이 많았는데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국 문학사에서 근대와 현대 노동자를 다루는 장편 소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고요.
2000년대 후반에도 아르바이트나 도시 빈민, 비정규직을 이야기하는 문학은 많이 있었지만 산업 노동자를 다룬 것들은 드물었던 것 같아요.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노동쟁의와 투쟁은 소설로 반영되지 않았어요. 카프 계열에서 나올 법도 했는데, 대부분 장편은 농민 이야기고 산업 노동자 이야기는 단편에 그치더라고요. 식민지 근대부터 노동자를 전면으로 다룬 장편소설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정도였죠. 왜 이 부분이 빠졌을까 바라보니 결국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노동운동의 전통은 사회주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아마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건드리기에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주제가 되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노동의 일반성에 비해 작품 수가 적은 편이긴 하죠.
지금 노동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인터뷰도 다 노동이죠. 그런데 노동자로서의 인식이나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게 됐어요. 왜? 노동자라는 자각이나 계급의식이 사라졌으니까요. 30년 동안 산업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근대화와 민주화에 큰 밑받침을 했는데도 그 부분을 문학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구상부터 집필까지 30년이 걸리셨다고요. 갈아엎고 다시 쓴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겨레>에 몇 달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북에서부터 접근한 게 잘못됐다 싶었어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사회주의를 마치 낡은 이야기처럼 느낀 이유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몇 년 전 자전을 쓰면서 때를 놓쳤다고 깨달았죠. 지금도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고공에 올라가 세상에 호소하고 있는데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잖아요. 이게 결코 낡은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짐 싸고 익산으로 내려가서 다시 썼어요.
기차라는 소재 자체가 근대의 상징이에요. 근대와 현대를 잇는다는 발상에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기차도 그렇지만, 방북 당시 만났던 부지배인의 영등포 이야기에 더 이입되었던 것 같아요. 나도 영등포 출신이에요. 어렸을 때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을 많이 봤죠. 6.25때 부모님따라 피난길에 오르면서 전쟁의 흔적들을 봤고, 이후로도 개발독재 30년을 겪기도 했어요. 영등포를 무대로 이야기를 그리면 변화했지만 번지수는 똑같은, 식민지 근대와 현대를 관통하는 서사를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천상도 지상도 아닌 곳에서
<채널예스> 연재 당시 맨 첫 문장은 ‘이진오는 똥을 누고 있었다’였어요. 책에는 실리지 않았더군요.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책을 들자마자 똥을 누고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것 같아서 살짝 바꿨어요. 그밖에 연재에 쫓기면서 역사적 사실을 가져다가 채워놓은 부분이라든지, 스토리텔링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다 들어냈어요. 연재는 2,600매 정도 되었는데 한 달 정도 집중해서 싹 추리고 고쳐서 책으로 묶인 건 2,200매 정도예요. 군더더기나 옆으로 샌 이야기도 추리고, 헷갈렸던 인물 이름도 통일시키고요.
환상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아요. 주안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르케스의 마술적 현실주의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우리 민담 형식이 원래 사실적이지 않잖아요. 우렁이가 각시로 변해서 밥을 해주기도 하고, 별의별 이야기가 다 있죠. 마르케스의 소설은 남미 전설이나 신화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중남미가 겪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은 정확히 보이지 않고 안개처럼 깔아 놨었죠.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역사가 생활 속에 들어와 민담과 더불어 가는 형식이에요. 더욱 뚜렷한 현실이 눈앞에 있는 거죠. 물론 가상의 세계로 일관하고 역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본능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여기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책무 때문이기도 하겠죠. 죽을 때까지 책무를 짊어지고 가자는 생각을 해요.
대개 현실에서 벗어나 물리 법칙에 어긋난 이야기를 하면 독재 정권 아래서 진실을 말하기 어려웠다는 평론이 붙곤 하죠.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쓰다 보니 현재에 발 딛은 노동자가 굴뚝 위에 서서 과거의 시간을 통해 지금을 표현하는 게 좋은 방법이었어요. 어느 독자가 굴뚝 위를 천상도 지상도 아니고 중간인 중음계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천상도 지상도 아닌 곳에서 일상을 견뎌야 하니까 상상을 하기 좋은 위치였을 거예요. 만약 굴뚝을 빼고 처음부터 이백만 할아버지가 인천에 가서 무슨 직업을 가졌고 누구를 낳았고 그는 또 누구를 낳았고 하면서 시간 배열 순으로 서술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급박한 현실이 지나가는 와중에 상상력이 끼어드는 게 서사를 풍요롭게 만든 것 같아요.
이진오가 상상하면서 여러 시대로 건너뛰는데, 시대에 몰입하는 힘은 생활의 세부 묘사라고 생각했어요.
쪼끄마한 큼큼이 아저씨가 거한의 불알을 잡아서 꼼짝도 못하게 하는 일화도 있고, 주안댁이 갑자기 수레를 번쩍 들어서 사람들을 구해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어린 시절에 동네에서 숱하게 듣던 이야기예요. 내가 43년생이니까, 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그런 세계가 실제로 있었죠. 그때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캐릭터를 훨씬 풍부하게 만들었어요.
밥 먹는 장면이 좋더라고요. 물에 밥 말아 먹는 장면만 나와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에요.
용변 보는 장면부터 시작하잖아요. 그리고 먹죠. 굴뚝으로 밥이 올라가요. 자고 먹고 싸면서 그 안에서 하루를 또 보내는 게 사람의 삶인 것 같아요.
‘영숙이 누나’에게 눈길이 갔는데요. 김진숙 전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이야기로 읽혔어요.
사실 처음부터 김진숙 씨를 주인공 모델로 삼으려고 만나려 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한참 동안 숨어서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어요. 아프기도 하고, 오래 투쟁해 왔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힘들었겠죠. 하는 수 없이 그 뒤에 올라갔던 차광호 금속노조 전 지회장을 만나 취재를 했죠. 소설에 나오는 고향에 갔다거나 도망 다녔다거나 하는 건 김진숙 씨하고는 상관없이 다 지어낸 이야기예요. 다만 농성하러 올라갔던 철탑이 거대한 나무로 변해서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이야기는 김진숙 씨의 『소금꽃나무』에서 나온 말이에요. 그 말이 아주 좋아서 인용했어요.
영숙이 누나 외에도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해요.
주안댁 막음이, 신금이 그리고 한여옥. 김영숙도 그렇고,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윤기를 주는 건 여성 캐릭터들이에요. 여성 캐릭터들이 신화도 만들고 전설도 만들었죠. 이들이 없으면 이 이야기는 그냥 철근만치 차갑고 딱딱한 산문일 거예요.
한여옥은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요.
옛날처럼 대하소설로 쓰였다면 만주로 무대가 옮겨가서 한여옥이 무장투쟁하는 이야기가 나왔겠죠. 밀정과 독립군들, 공산주의자, 자본가가 얽히는 풍부한 서사였을 텐데, 그러려면 10권은 써야 하니까요. (웃음) 등장인물은 오고 가더라도 영등포와 인천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끝나게 했어요.
이행기를 줄이는 과정
“현장에 가면 노동자들이 이해를 못해요. 왜 별 차이도 없는 노선을 가지고 다투냐구요.”(259쪽)라는 말이 있었어요. 운동 진영에서 힘을 보태면서 노선에 회의감이 든 적도 있을 거예요.
아마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이념적 갈등이 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이 죽였어요. 크고 작은 분쟁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들을 보도연맹으로 만들어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싹 죽였잖아요.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고 하는 건 모순이에요. 그전에 이미 38선에서는 일 년에 수십 회씩 무력충돌이 있었고 지방에서는 지리산이든 한라산이든 게릴라들이 싸우고 있었어요.
야마시타 최달영이 일본을 도와서 조선인을 색출하는 계기는 아끼던 돼지의 죽음이었죠. 일제 강점기 일본 편에 섰던 사람을 향한 연민으로 느껴졌어요.
야마시타 최달영은 따로 떼어서 소설을 씀직한 인물이에요. 신금이하고 주안댁만큼 최달영에게 애착을 느껴서, 따로 최달영 전을 쓰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은 다 자기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친일을 저지르죠. 야마시타가 잘 먹고 잘 살고 힘 있으면 되는 거지 무슨 의리가 소용 있냐는 건 사실 이명박 정권 때 하던 이야기와 같아요.
친일파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기는 쉽지 않죠.
이일철 입장에서도 철도원 일은 살아남기 위한 거였죠. 일반 백성 입장에서 보면 일본 놈들이 나쁜 놈들이고,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했다는 건 다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 뒤에 전국에서 수천 번씩 마찰이 일어나요.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농민들이 작당해서 수십 일 동안 항쟁하는 건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게 아니겠죠. 특히 30년대에는 아주 치열했는데, 전시체제로 바뀌면서 치안유지법이 더 강력하게 작동해서 항쟁이 많이 잦아들었어요. 처음부터 순순히 압제를 받아들이고 먹고 사는 데만 매몰된 건 아니에요. 역사적 자료를 보면 각자 처한 입장이 다 다르고 일화나 에피소드가 풍부에서 사실 어떤 걸 취사선택해서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이야기 거리가 많아요.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요. (웃음)
하지만 이진오가 굴뚝에서 내려왔을 때, 현실은 그렇게 나아지지 않았어요.
또 다시 시작하는 거죠. 여러 사람이 지금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몰락하는 과정, 또는 전혀 다른 체계로 가기 위한 이행기라고 이야기하죠. 역사를 보면 이행기는 짧을 때도 있고, 굉장히 길 때도 있어요. 서양의 자본주의 근대화 이행기를 르네상스부터 산업혁명까지 300년 정도로 잡잖아요. 우리는 30년 했으니 큰 틀에서 놓고 보면 변화의 과정도 그만큼 길지 않겠어요? 그동안 사회주의도 해보고 이른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도 해보고, 다양하게 시도해 왔으니 이 기간을 짧게 줄이는 건 우리 노력 여하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금이는 “그때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564쪽)고 말해요. 마치 작가님의 말씀처럼 들렸어요.
이긴다기보다 변화하는 거죠. 그 변화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요. 그래도 어쨌든 나선형으로 가요. 어떤 때는 뒷걸음질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옛날하고 똑같이 가는 것처럼 보여도 두 걸음 뒤로 갔다 세 걸음 앞으로 가다 보면 변화하겠죠.
소설을 끝내고 난 뒤 이진오의 삶을 상상해보기도 하세요?
지금도 그 사람들은 거리에 있어요. 식구들은 각자 뿔뿔이 알바하고 마트에서 캐셔하고, 밤에 서로 만나기 힘들겠죠. 산재가 나서 죽을 수도 있고요. 미국은 10만 명이 코로나로 죽었는데 흑인 민권 운동도 난리가 났잖아요. 가장 첨단 자본주의를 이루어내는 미국의 벌거벗은 모습을 다 보고 있어요. 저런 사회로 가는 게 올바른가 질문하게 되는 거죠. 더구나 우리는 분단 상태인 데다 정치 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와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갈 길이 아주 멀고,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긴 힘들겠죠.
코로나19 이후 다음 작품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셨다고요.
포스트 코로나라고 부르면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짐작하고 있는데, 과연 백신이 나오면 옛날로 돌아갈까요? 현재까지 우리가 저질러 놓은, 발전했다고 믿었던 문명이 과연 올바른 길로 온 건가 하는 질문이 이제 생긴 것 같아요. 이행기를 줄이기 위한 노력에서 여러 가지 태도나 방법이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 작품은 어떤 걸 생각하고 계시나요?
익산에 가면서 미륵사상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종교답지 않게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사람도 관계의 그물망 속의 하나일 뿐이지 사람이 중심이 아니잖아요. 불성에 관한 이야기를 철학 동화 비슷하게 쓸까 해요. 이번에 익산에서 작업실을 만들어 준다고 해서 거기서 쓰려고요. 이제 내가 78세니까 10년을 더 쓸 수 있다면, 아마 세계문학사에서 작가 중에는 제일 오래 쓸 것 같아요. 그때까지 총기를 유지하면서 계속 썼으면 좋겠어요.
글 | 정의정 사진 | 신화섭(스튜디오 무사)
황석영 저 | 창비
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꿰뚫는 방대하고 강렬한 서사의 힘. 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들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도서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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