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맛 우유가 있다면 이런 색 칠레, 파타고니아
대자연을 만나러 가다
1,200만 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자연의 선물 |
대자연에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이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광활함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도시인에게 문명의 편리함과는 거리가 먼 대자연이 내키지 않는다. 대자연은 인간의 발길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으니 그 길까지 가는 여정도 험난하다. 사진으로 만났던 풍경을 굳이 고생하며 내 눈으로도 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대자연을 만나기 전, 내 모습이다.
‘도대체 어떤 아름다움을 보여 주길래’, ‘트레킹의 매력이 뭐길래’, ‘힘이 들면 얼마나 들길래’ 순진한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Torres del Paine으로 향했다. 1,200만 년 전, 빙하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독특한 지형으로 지구상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절경으로 순위 안에 꼽힌다.
제대로 된 등산 장비를 갖추지 못해 면바지와 운동화, 대여한 배낭과 텐트를 둘러메고 3박 4일 트레킹에 나섰다. 학교 다닐 때도 책은 사물함에 다 넣어 놓고 빈 책가방에 들고 다녔다. 세계여행을 떠날 때도 무거운 배낭이 싫어서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평생 한 번도 짐다운 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는 나의 고상한 어깨는 고작 4일 치 식량을 담은 가방도 버거워했다. 고생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 같았다.
텐트를 철수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는 여행객들로 분주한 아침, 나 홀로 침낭 안 망부석이 되었다. ‘빌어먹을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트레킹 3일 째, 아무것도 하기 싫어 예정된 일정도 포기하고 침낭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을 참이었다. 육체의 피곤함보다 의지가 사라진 게 더 큰 문제였다. 산 넘고 물 건너 오늘 하루 동안 15km를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 그 남자가 따뜻한 숭늉을 건네며 심술 난 어린애 마냥 투정을 부리는 나를 어르고 달랬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오르막을 바라보며 걷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신발을 바라보며 걸었다. 군대에서는 행군할 때 지치고 힘들면 그냥 고개 처박고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걸으라고 한다면서 움직이는 자신의 발을 따라오라던 남자의 말이 없었더라면 완주는커녕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난 푸르른 생명력을 감상할 기회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 날, 파타고니아의 바람을 이기지 못해 무릎 높이까지밖에 못 자란 나무들의 숲을 만났다. 일 년에 날씨 좋은 날이 며칠 없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우린 운이 억세게 좋구나’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단풍과 황금빛 갈대숲 그리고 청명한 날씨. 하늘 맛 우유가 있다면 이런 색일 거 같은 하늘빛까지 눈 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이 그림이다.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옅고도 푸른 호수는 산 아래에서 고요히 요동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지형이 이곳에 있었다. 트레킹을 하며 만났던 영국의 노신사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난 여기를 오는 데 70년이 걸렸는데 자네들은 행복한 사람들이구먼.”
파타고니아 공기 통조림
타버린 나무들 |
한국의 봄은 더이상 행복하지 않은 계절이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숨 쉬는 것조차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지난 며칠, 무더운 여름이 끝난 뒤 찾아오는 청명한 가을 같은 하늘이 등장했다. 기억 속에서 잊힌 파란 하늘이 반가운 많은 이들이 카메라로 그 쨍한 아름다움을 기록했다. 뚜렷이 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지구의 남쪽 끝, 파타고니아를 거닐던 날을 떠올렸다.
통조림으로 파타고니아 공기만을 담고 싶을 만큼 깨끗한 지구의 남쪽 끝. 그것으로 설명을 끝내기엔 부족하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푸른색이 잠들어 있는 땅이자 그 공기는 회색빛 미세먼지로 가득 찬 내 폐 속까지 파랗게 물들일 것만 같다. ‘외계인이 지구에 우주선을 숨겨두었다면 여기 어딘가이지 않았을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파타고니아 호숫가를 걸으며 쓸데없는 공상을 해 본다.
원시 그대로의 자연을 지닌 이 땅은 여행객을 불러 모은다. 특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은 오롯이 자연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다. 그 여자와 나도 나흘 동안 파타고니아를 영접하기 위해 텐트와 먹을 것을 가방 가득히 넣고 그 틈에 끼었다. 유럽, 아시아, 이스라엘 등 먼 길을 마다 않고 지구의 남쪽 끝에 위치한 성스러운 땅을 걷고자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언제나 여행객을 환영해주면 좋으련만 겨울철 만큼은 순례자의 방문에 손사래를 친다. 눈 덮인 대자연을 걷는 일은 위험하거니와 그 시간만큼은 땅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땅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자연이다.
조심스럽게 다루어 달라고 부탁을 해도 인간은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쳐 버린다. 몇 해 전, 무모한 이스라엘 여행자의 불장난에 태초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자연이 불타버렸다. 멀리 파타고니아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몇 주 전, 여의도 4배 면적인 1,103ha가 사흘 만에 사라져 버린 강릉 일대 산불도 입산자의 실화로 추정된다고 한다. 고작 100년을 사는 인간이 몇 만 년을 살아온 자연을 한순간에 망쳐 버린 것이다.
파타고니아와 강릉 일대를 불태운 산불도, 미세먼지로 뒤덮여 숨 쉬는 것 마저 걱정스러운 하늘도, 물길을 뒤집어 마실 물마저 걱정하게 만들어 버린 4대강도 그 피해 원인은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필요 이상 자연을 획득하며 파괴한 뒤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은 유목 시절부터 이어져 온 사피엔스의 생존 방법이다. 숙주에 기생하며 영양분을 빨아 먹고 그 세포가 고사하면 다른 세포로 옮겨 사는 바이러스 또한 인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고 한다.
더없이 깨끗한 하늘을 만난 며칠이었다. 당연한 듯 사용하던 자연의 소중함과 그것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까지 확인했으니 이젠 생각을 바꾸게 될까? 파타고니아 공기를 통조림에 담아 팔 건지 말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렸다.
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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