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스 룰 : 여성을 배척하라
약자를 문제의 원인으로 만드는 방식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1~1882 |
어릴 때 막내 삼촌이 선보고 오던 날, 어른들은 뭔가 들떠 있었다. 긍정적인 미래를 예측했다. 맞선 상대 여성이 삼촌과 좋은 분위기에서 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거의 30년 전이다. “마음에 안 들면 밥을 안 먹는다니까. 둘이 차 마시고 밥까지 먹고 왔대. 아가씨가 세상에 그 똥차(당시 삼촌의 낡은 화물차)에도 올라타더란 거야. 젊은 아가씨가 그런 차에 타는 거 꺼릴 수도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탔다니까. 마음에 있었어, 마음에 있는 거야.” 맞선 날 삼촌이랑 차 마시고 밥도 먹고 그 낡은 ‘똥차’를 타고 함께 이동했던 그 여성은 다음 해 삼촌과 결혼해서 나의 외숙모가 되었다.
요즘은 첫 미팅 날 같이 밥 먹었다고 긍정적 신호로 여기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함께 밥 먹는 이성 관계에 더욱 의미부여를 많이 했다. 이성 간의 식사는 유혹의 전초전으로 여겨지기에 십상이다. 데이트 신청을 하면서 식사시간을 비껴가는 경우는 없다. 만약에 프러포즈를 한다면 근사한 식당을 예약한다. 양쪽의 부모가 만나 밥이라도 먹으면 이건 확실히 결혼을 위한 자리다. 상견례. 여남의 만남은 유혹의 장, 사적 관계로 환원된다.
요즘 펜스 룰이 화제다. 펜스 룰(Pence Rule)의 기원은 현재 미국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인디애나주 하원의원이던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펜스가 아내가 동석하지 않는 자리에 다른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데서 비롯되었다. 보수적 기독교 윤리에 따라 그는 아내가 아닌 여성과 단둘이 만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괜히 오해를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마이크 펜스는 반듯한 겉모습 덕분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트럼프에 비해 ‘뭔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지독한 보수 기독교인으로 낙태나 성소수자 관련 정책에 있어 한 치의 융통성도 없다. 종교를 핑계로 낙태를 반대하며 생명 존중을 외치지만 총기 규제는 반대한다. 이처럼 위선적인 그의 태도는 펜스 룰에도 적용된다. 가정적이고 아내를 존중하는 듯하지만 실은 여성을 성적인 대상에 한정하는 셈이다. 이런 생각도 문제가 있지만 이 생각이 태평양을 건너오자 더욱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한국에서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자 이 펜스룰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바로 남성들이다. 여성과 1:1로 만나 오해를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는데, 여자와 일 안 한다는 뜻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무고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웃기지도 않은 핑계를 댄다. 그런 식이라면 여성들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남성들을 배제해야 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여성을 배제하는 이 방식은 아이가 시끄럽다며 입장을 거부하는 노키즈존과 일맥상통한다. 함께 둘러앉아 환대하는 세상이 아니라 약자를 문제의 원인으로 만들어 뽑아낸다. 성범죄의 원인을 여성에게서 찾기에 이 존재를 원천봉쇄하려는 발상이다. 흔히 남자가 조심할 대상으로 술, 도박 그리고 여자를 든다. 주색에 빠진다고 한다. 이들에게 여자는 술과 도박과 동급이다. 자칫 남자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위험한 대상이다. 남자를 위협하는 영원한 악. 바로 여자라는 꽃뱀.
툭하면 ‘성대결’ 하지 말라거나 ‘모든 남자가 가해자는 아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성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을 왜 환영할까. 여성상위시대라고 징징거리지만 남성들이 실제로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임을 방증한다. 여성이 성적 대상이 되거나 성역할에 충실하지 않으면 조직에서 함께 일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의 과시이다. 지금 많은 남성들은 ‘잠재적 무고 피해자’가 되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남성 권력을 과시한다. 이들은 성범죄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범죄자로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요즘 기업 채용 면접에서 여성들에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 고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며 고의적으로 불이익을 준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나 연예인, 정치인의 행실을 폭로하면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지지만, 일반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일은 정말 피해자만 고스란히 사라지기 십상이다. 여성 인턴을 남성이 성추행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여성 인턴을 뽑지 않기로 하거나,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둔다는 이유로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 등 언제나 여성을 배척하는 선택을 해왔다. 여전히 여성이 문제다. 이는 공적 영역을 남성화시킨다.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언제나 성적으로 남성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어쩜 십수 년 전 내가 겪은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까 놀라곤 한다. 여전히 여성들은 결혼, 출산과 관련된 질문을 받는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어도 없다고 대답한 적 있다. 어떤 남자가 “결혼하면 일 그만둘 거 아냐?”라는 질문을 받을까. 결혼 안 한 남성은 예비 가장이라서, 결혼한 남성은 가장이라서,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 있어서 직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여성은 결혼 안 한 여성은 책임질 가족이 없다고, 결혼한 여성은 남편이 있다고, 애 엄마들은 직장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직장에서 눈치를 준다.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의 이름을 보면 한국사회의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인다. 비서실, 비즈니스 클럽....... 작은 마을에서도 터미널 근처에서 이런 간판을 본다. 계층과 젠더의 위계를 통해 굴러가는 ‘비즈니스’다. 이런 간판을 볼 떄마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이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미술평론가 그레젤다 폴락은 이 그림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마네와 동일한 계층의 여성은 이러한 공간들을 익숙하게 느끼고 있었을까?”
이렇게 대놓고 유흥업소가 아니어도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은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섬세하게 굴러간다.
“언뜻 보기에는 골프코스를 한 바퀴 도는 것과 그 지역의 랩댄스 클럽을 방문하는 일에는 별 공통점이 없다. 둘 다 여가 활동이라는 건 사실이지만 하나는 보수적이고, 관습적이며, 심지어 아가일 무늬의 양말을 신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남자 바지의 지퍼 부분에 성기를 비벼 대는 벌거벗은 여자들이 개입한다. 그러나 그들이 공유하는 건 고객과 어울리는 귀중한 기회에서 여성을 배제하기에 충분한, 하나의 영역을 제공하는 환경이다.” (코델리아 파인, 『젠더, 만들어진 성』 , 119쪽)
“일터에서 여성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 모를 성희롱”은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성’희롱’이라고 하니 유혹과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히는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이다. 아울러 한국은 1:1 만남에서 유혹을 가장하여 자행하는 추행보다는 여러 사람이 있는 앞에서 집단적으로 여성을 대상화 하는 사회 분위기가 강하다. 업무상 회식이지만 여성은 접대부가 되거나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 접대부나 엄마로 여기지 않고 여성과 관계 맺는 법을 모르는 심각한 상태에 이른 남성들은 가장 쉬운 방법인 배제를 택한다. 여자를 유혹하지도 여자에게 유혹받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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