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레이먼드 카버와 편집자 고든 리시의 관계
다시, 편집자란 무엇인가
독자일 때는 몰랐다가 편집자가 된 이후에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필자의 글이 ‘그대로’ 책에 실리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었다. 일단 맞춤법과 띄어쓰기부터 시작해서 때로는 문장을 통째로 고치기도 하는데 이 업무는 편집자가 수행한다. 내가 잡지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편집장으로부터 원고를 하나 건네받았다. 탈북자의 인권에 관한 글이었다. 필자는 모 대학 교수였다. 내용은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통찰을 제공해 주어 진심으로 감탄했다.
문제는 읽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문장이 엉망이었다. 경력이 일천한 내가 보기에도 한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글쓴이가 책임질 일’이라 여기고 나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수정하자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그랬다. 한데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라면 이렇게 썼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든 빨간 펜이 부르르 떨렸다. 이거 하나만 고치자. 한 문장이었지만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고쳐놓으니 오랫동안 방치해둔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뢰는 곳곳에 있었다. 내친 김이라 여겼다. 국지전은 이내 전면전으로 바뀌었다.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경우는 모조리 잡아 족쳤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비문이 딸려 나왔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고치고 또 고쳤다. 슬슬 기세가 붙었는지 그 무렵부터는 거리낌이 없었다. 만족스러웠다. 편집자로서 뭔가 한몫한 듯했다. 요맘때의 북한산 둘레길을 수놓은 단풍을 방불케 하는 교정지를 필자에게 보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열심히 들여다봤으니 조금쯤은 그 노고를 치하해주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난리가 났다. “감히 내 원고에 손을 대다니”라는 말이 날아들었다. 나랑은 얘기도 하지 않았다. 편집장과 직접 통화했다. 잡지에서 자신의 원고를 빼겠다고 했단다. 편집장이 필자를 만나러 갔다. 결국 원문을 그대로,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어긋난 대목만 수정하여 싣는 걸로 간신히 사태가 수습되었다. 필자와 만나고 돌아온 편집장은 나를 혼내지 않았다. 지나가듯 “앞으로는 조심해”라고만 했을 뿐이다. 풀죽은 편집자의 기를 더 꺾지 않으려고 던진 말인지 어쩐 건지는 지금까지도 알 도리가 없다.
갑자기 이런 일화를 떠올린 까닭은 지난주 내내 붙들고 있었던 『레이먼드 카버-어느 작가의 생』이라는 평전 때문이다. 작가 레이먼드 카버와 편집자 고든 리시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도 이런저런 풍문을 듣긴 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모르던 터였다. 언제 시간이 나면 봐야지 생각하다가 10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왔는데 얼마 전 휴가 겸 해외에 나갈 일이 있어서 들고 나간 김에 슬슬 거들떠보았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2012년에 출간되었다.
레이먼드 카버(왼쪽)와 고든 리시(오른쪽) |
카버와 리시는 네 살 터울인데다(카버는 1938년생, 리시는 1934년생) 일찌감치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으며 그럼에도 문학에 대한 야망이 가득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흡사하다. 문학적 멘토를 찾아다니던 카버는 캘리포니아 치코주립대학에서 존 가드너를 만나 작가로서의 꿈을 계속 키워간 반면 “리시가 만난 사람은 자신이 스탠포드에서 배운 대로 고전문학의 가치를 설파하던 작문 강사 에드워드 루미스였는데 리시는 수업 시간에 제출한 자신의 글에 대한 루미스의 반응에 좌절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강의실을 떠나”게 된다.
작가로서의 꿈을 ‘잠시’ 접고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리시는 엄청나게 많은 소설을 읽었으며 직접 잡지를 발행하며 수십 명의 작가를 인터뷰 하는 등 문학적 관계망을 만들어나가는 일에 매진한다.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그는 <에스콰이어>의 소설 편집자로 입사하게 된다. 1933년에 창간한 <에스콰이어>는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같은 작가들의 소설이 게재하며 명성을 얻었고 플래너리 오커너와 존 치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최고 수준 작가들의 작품이 실리기도 한 잡지였다. 리시의 임무는 침체된 <에스콰이어>에 새로운 소설을 싣는 일이었다.
잠재력이 있는 작가를 발굴하는 일에 리시는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온갖 매체에 발표된 소설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중에서 자신의 눈에 띈 작가들을 섭외하여 지면을 제공했다. 하지만 무작정 지면을 준 것은 아니었다. 리시는 <에스콰이어>에 실리게 될 소설들에 공격적인 편집을 가했다. 일단 리시의 손을 거친 소설들은 상당 부분 변형되었고 원래의 톤을 찾기 힘든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가 리시가 제안한 수정 작업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평전의 저자는 적고 있다. 리시에게는 대부분이 인정할 만한 실력, 즉 소설을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실력 있는 편집자와 잘 지내고 싶어 했다. 그중에는 레이먼드 카버도 있었다. 두 사람이 각별해진 건 1967년 무렵이다. 당시 카버는 파산 상태여서 집 전화가 끊길 지경이었고 알코올중독으로 아내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와 만난 레이는 “<에스콰이어>에 작품을 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작품을 써내려갔다. <에스콰이어>에 입사하며 발행인에게 새로운 소설을 조달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던 리시 입장에서도 레이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둘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의기투합했지만 1972년 3월에 <에스콰이어>에서 보내온 교정지를 받아본 카버는 기함하고 말았다. 제목을 비롯하여 내용의 상당 부분이 리시에 의해 수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 카버가 불만을 토로하자 아내 메리앤은 절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제도권에 팔려가려고 애쓰는 창녀”가 되지 말라면서. 하지만 카버는 리시의 편집본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잡지의 고료가 절실했고 리시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며 어찌 됐든 이 소설들을 단행본으로 묶어서 펴낼 때는 내용도 제목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면 단행본 작업은 카버의 바람대로 진행되었을까. 한 권의 책을 묶을 수 있을 분량의 단편이 모였을 때 카버는 리시에게 연락했다. <에스콰이어>를 그만두고 크노프(알프레드 크노프가 1915년에 창업한 출판사)에 적을 둔 리시는, 그동안 발표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원고를 검토해 달라는 카버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으며 자신이 몸담은 크노프에서의 출간도 주선한다. 이 책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판매는 경이적이었다. “단편집으로는 놀랍게도 하드카버 만오천 부가 모두 팔렸고 추가 제작에 들어갔다. 빈티지 출판사에서는 페이퍼백의 권리를 위해 20,000달러를 지불했다.” 이 책을 읽고 카버의 팬이 된 독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카버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2007년의 어느 날 <뉴욕타임스>에서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카버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리시에 의해 수정됐다’는 기사를 게재했고 이는 문단의 대형 스캔들이 되었다. 카버의 두 번째 부인인 갤러거는 고인의 뜻에 따라 최초 원고를 그대로 출간하기로 결정한다. 생전에 카버가 정한 제목은 『풋내기들』이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레이먼드 카버가 쓴 『풋내기들』과 레이먼드 카버가 쓰고 고든 리시가 편집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 전까지는 경험할 수 없었던 이란성 쌍둥이적 독서체험을 할 수 있게 된 독자들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극단적으로 절제된 미니멀리즘의 정수”라거나 “편집자 나부랭이가 건드리지 않은 『풋내기들』이야말로 더 강건하고 더 문학적이다”라고 제각각 평가하는 듯하다. 평전의 저자를 포함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이들이 후자를 더 선호하는 듯한데 뭐 나도 그런 선호에 대해 딱히 가타부타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출간할 당시에 카버와 리시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카버는 작가 생명을 걸고 리시의 편집본이 출간되는 걸 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리시는 단호하게 카버의 요구를 거절하고 책을 출간했다. 그로 인해 명성을 얻긴 했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출판사와 편집자를 고를 수 있었을 터인데 카버는 왜, 대관절 어찌하여,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이후 출간된 마지막 작품집 『대성당』의 책임편집을 또다시 리시에게 맡겼던 걸까. 흠,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
글ㆍ사진 |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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