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무진기행」 때문에, 안개 때문에, 아니, 덕분에
순천만 화포포구로 가는 길
모든 게 안개 때문이다
새벽안개를 말끔히 지우기엔 헤드라이트 불빛은 너무 보잘 것 없었다. 가로등도 없는 한적한 시골길은 뿌연 안개가 점령해서 마치 이방인을 검문이라도 하듯 속도를 내지 못하게 했다. 나는 핸들을 꽉 잡고 차창까지 와서야 부서지는 안개 너머를 바라보려 애썼다. 순천의 짙은 안개는 어디에서도 만나보지 못했기에 생경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감각은 점차 익숙해졌다.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적응이 빠른 동물인 탓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는 『무진기행』이 생각나서가 아닐까.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일어나서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나는 눈앞의 안개를 소설의 한 장면으로 투영시키고 있었다. 순천은 김승옥의 고향인 만큼 안개 역시 무진과 닮았다. 소설의 화자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액셀을 밟은 발을 저어하게 되었다. 속도가 더 느려졌다. 안개는 차창으로 스미어 이미 나의 숨 속에 섞여있는 지도 몰랐다. 문득, 왜 이른 새벽부터 안개를 헤치며 순천의 포구로 찾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 회의가 생겼다. 고백하자면 포구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초가을의 어느 날, 부산 KBS의 ‘바다에세이 포구’ 제작진으로부터 포구로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몇 가지 의문을 품었다. 첫 번째는 왜 내가 선택되었냐 하는 것이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문학청년인 나를, 가끔 기타를 들고 젠 체하며 이리저리 얼쩡거리던 나를, 왜? 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어정쩡한 어설픔이 나의 특기였던 걸까. 두 번째 의문은 포구가 과연 좋은 여행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뒤따라 잡스러운 의문들이 안개가 되어 머릿속을 자욱하게 매웠다. 나는 시청자에게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여행을 떠나도 좋은 나이인가.
안개에 가려진 청춘이라는 용기
이 일대가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지만 무진의 안개는 어느 곳에나,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렇기에 한편의 문학작품이 오랜 세월동안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무진의 안개는 청춘이다. 사랑이란 관념은 겨울 내 굳어진 땅처럼 차가운 온도로 식어있었고, 긴 시간 간직해온 꿈은 아직도 안개 속 어딘가에서 숨어있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는 것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나는 제법 지쳐 있었다.
안개는 벌써 이십여 분 동안이나 걷히지 않고, 오히려 깊어져만 갔다. 되돌아가는 것만이 안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인 듯했다. 하지만 옆자리와 뒷좌석에는 연출과 작가와 카메라 감독과 보조기사가 타고 있었다. 모두들 형체 없는 안개 속에서 저마다의 실체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촬영 팀과 한 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거나 이미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전날, 숙소에서 함께 투숙을 할 때에도 첫 촬영에 대한 기대와 설렘, 두려움과 자신감이 뒤섞여 제법 긴장이 되었다. 작은 소리에도 번뜩 번뜩 눈이 뜨여, 이등병 시절로 돌아간 듯도 했다.
지독한 안개 속을 헤치고 있자, 지나온 시간들이 일일이 조각나서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 자신이 여러 개로 분리되는 이물적인 느낌은 참기에도 감추기에도 힘든 것이었다. 이제껏 뭘 하며 살아왔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속상하고 또 몹시 서러웠다. 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 모든 어머니를 위하여
졸음을 쫓기 위해 차창을 내렸다. 불현듯 밀려오는 짠 냄새가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이 냄새는 내가 잘 아는 바다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다 나는, 이 냄새가 바다에서 퍼져 나온 냄새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뜬금없는 공상에 빠졌다. 찾게 될 포구의 이름이 화포(花浦)니, 어쩌면 내가 맡아보지 않은 꽃향기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느새 마을 입구에 정승처럼 버티고 선 돌비석이 이방인을 맞이했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안개가 진즉에 걷혔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헤드라이트를 끄자 어둠만이 남았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흔들렸지만 저곳이 바다인지 아직 누군가 잠들어 있을 집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온몸을 저리게 하는 소름이 기척도 없이 찾아왔다. 겨울 초입의 찬 기운 때문이겠거니, 하며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 때문이었다. 시계바늘은 이제 막 새벽 4시를 가리켰다.
“누가 있다.”
카메라 감독이 소리죽여 말했다. 우리는 일제히 선창을 바라보았다. 선창 중간에 사람 형상의 실루엣이 보였다. 분명히, 누군가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기도 힘든 날씨였다. 하물며, 해가 뜨기에도 먼 이른 새벽녘에 누군가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레 낯선 형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는 할머니 한 분이 녹색의 바케스를 의자삼아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먼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가보아도 할머니의 자세와 표정, 공간을 차지하는 모든 것이 기다림 그 자체였다.
할머니는 여행자를 크게 낯설어하지 않았다. 화포포구가 해돋이로 유명해져서다. 반면에 나는 우물쭈물하며 어정쩡한 인사를 건네고야 말았다. 할머니라는 존재와 대화를 나눈 것이 너무 오래된 탓이었다. 사회가 핵가족화 되어가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쉽지 않았다. 간혹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할 때도 있지만 눈인사를 건넬 뿐, 이렇게 가까이서 소통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의 어설픈 질문에도 할머니는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었다. 아무도 눈뜨지 않은 시간에 포구에 나와 있는 것은 건너 마을에 시집 간 딸애에게 줄 반찬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의 주름의 깊이만 보아도 딸 역시 부모가 되어도 족할 나이였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딸애라는 애칭을 달리 쓰지 않고, 몇 번이나 똑같이 말했다. 새벽에 잡은 고기는 곧장 위판장으로 나가기 때문에 선창에서 직거래를 하는 것이 싸게 칠 수 있다고 할머니는 설명해주었다. 더군다나 많이 잡혀온 날에는 대부분 덤으로 준다고 했다. 나는 덤이라는 말이 참 좋았다.
무식이 곧 용기였을까, 이렇게 일찍부터 배를 기다릴 필요가 있냐고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는 것은 금방 탄로나 버렸다. 포구의 시계는 태양이 아니었다. 일정 주기로 변하는 물 떼가 그들의 시계였고, 계절마다 달리 잡히는 어종은 그들의 달력이었다.
촬영팀은 할머니의 대답과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현장의 공기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기를 원했다.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자 할머니는 어떤 말씀도 하지 않았다. 강렬하게 쏘아붙이는 라이트를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이내 할머니는 자리를 옮기기 까지 했다. 우리는 촬영을 중단했다. 다시금 안개에 휩싸이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안개 덕분이다
포구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바다를, 바다 곁에 포구를 만들고 부락을 일궈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알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이 여행은 부딪쳐보지 않고 쉽게 돌아가려 했던 내 청춘에 대한 반성이었다. 나는 포구 사람들을 만나며 의뭉했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었다. 포구를 다니는 동안에는 조금 더 진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년 동안 서른 곳이 넘는 포구를 다녀왔다. 개인적으로나 방송으로나 모두 잊지 못 할 여행이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것은 청춘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안개처럼 막막하게 가려진 혼돈의 나날에서 시작되었다. 포구 여행이 이어져서일까, 서른이 지난 지금도 나는 소년이다. 그리고 소년의 고향은 바다다. 아니, 바다와 가까운 한적한 포구다.
나는 가끔 현실이라는 안개에 휩싸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면, ‘포구’라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둥글게 모아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단어가 왠지 어색하지 않다. 잠시 눈을 감고 소리의 길을 따라 가본다. 갈대밭 사이에 숨은 게를 잡고 싶어 안달 난 어린 아이를, 건너 섬마을로 시집 간 딸애에게 반찬을 보내려고 새벽 장을 보는 할머니를, 조업을 마치고 마른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는 선장님을 마주친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힘찬 물결을 만드는 한척의 배가 보이는 것만 같다. 문득 여수의 작은 섬마을에 계신 외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생각난다. 평생을 뱃사람으로 지낸 아버지의 두꺼운 점퍼에서 희미한 바다 냄새를 맡곤 했었지. 포구라 소리 내어 뱉었는데, 바다를 굽이돌아, 그리움이라 되돌아온다. 나에게 바다는, 포구를 품은 그 바다는 고향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여행은 그곳에 서서 잠시 읽어보는 것, 그려보는 것,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는 것. 누구나가 지금 당장 포구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글ㆍ사진 | 오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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