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맹의 변명 ‘김생민의 영수증’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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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쇼핑을 잘 못 한다. 지금은 그래도 조금 나아졌지만 막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거의 쇼핑맹(盲)에 가까울 정도였는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소비 권장 사회에서 쇼핑을 못 한다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불을 못 피운다는 말과 같다. 이미 호모 에렉투스가 불을 피운 지 170만 년이 지났는데! 사실 19세기 이후로 현 인류에게는 불 피우는 능력보다 쇼핑하는 능력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싶지만.
천장이 높은 백화점에 가면 기분이 번잡하고, 정복을 입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손님?'이라고 물어볼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아니 쇤네가 감히 이렇게 으리으리한 곳에 오다니요. 하다못해 마트에 가서 라면을 고르래도 스낵면을 고르면 가족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짜왕을 고르면 이걸 질리기 전에 다 먹을까, 팟타이 맛 라면이라든가 마라탕 맛 라면을 고르자니 내가 내 돈 주고 왜 모험을 해야 하나 싶고, 신라면 블랙을 고르자니 얼마나 호구길래 신라면 블랙 같은 걸 사나 싶은 생각이 교차하다가 결국은 늘 먹던 삼양라면을 고르는 식이다.
유통업계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받고 있지만, 유통업계에서 일하기에는 치명적이라고 할 만한 약점이다. '이 물건 좋아요! 이 책이 좋아요!' 하면서 열심히 하루에 8시간 이상 팔면서도, 내 삶 속에서는 호구 잡히지 않을까 내면의 불안함에 시달리며 월급의 단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또 우울하다. 특히 제목에 끌려 책을 봤는데 읽고 보니 내용은 별로면 그래도 명색이 책 소개한다는 사람인데 좋은 책을 볼 안목도 없나 또 좌절한다.
물질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구매하는 일에도 적이 서투르다. 철저하게 예약제로 돌아가는 강남의 미용실이나 기타 서비스업 가게에 가면 더욱 의기소침해지는데, 저들이 저 인테리어 비용과 서비스 비용을 나한테 전가하는 것이 아닌지 일부러 날을 세우고 있다가도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한테 날을 세워봤자 진상밖에 더 되겠냐는 생각에 미치면 또 나 자신이 싫어지고 그러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 의기소침함이 극에 달해 병원에서도 돈 주고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예를 들어 치과에 갔는데 100만 원이 나왔다, 그러면 속으로 의료기기의 가격과 원장님과 간호사와 코디네이터의 인건비와 감정노동비를 생각하고 그렇게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또 호구를 잡힌 게 아닐까, 치료를 받으면서 줄줄 우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었다고 하지만 실제 겪었던 내용이다. 이를 때우던 치위공사가 깜짝 놀라서 '많이 아프세요?' 라고 물었는데, 사실 전혀 안 아팠다. 나중에는 쪽팔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가슴 아플 일은 아니었는데. 아니, 100만 원이면 가슴 아프지, 암.
이 이질감이 어디서 오는가, 나는 왜 돈을 주고 서비스나 물질을 교환하는 일에 취약한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결국은 1) 어느 정도의 서비스가 어느 정도의 재화와 교환될 수 있는지 확신이 없다 2) 내가 돈을 주고 저 사람들의 감정 노동과 인격을 사는 게 싫다 정도의 이유였다. 서비스의 가격을 어림잡기 위해서는 열심히 돈과 서비스를 교환해보는 방법밖에 없는데, 일단 한 번 의기소침해진 마음은 열심히 소비를 해보려 해도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써 봤자 '스튜핏'이 되는 게 아닌가? 백날 아끼다가 정작 필요한 경험이나 지식은 갖추지 못한 채 잉여 인간이 되면 어쩌나? 저 사람은 굳이 저렇게까지 나에게 친절하게 굴 필요가 있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소비잼~! 탕진잼~! 하면서 살 수가 없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쓴다. 소소한 탕진잼으로 쇼핑을 배운 사람은 만 원짜리로 100번은 살 수 있어도 백만 원짜리는 부들부들 떨게 된다.
최근 '김생민의 영수증'이 화제라 하여 듣고 있다. 다이어트약을 사면서 식당에서 카드를 긁는 애청자 사연을 들으면서 웃고 있지만, 사실 조금 부럽기도 하다. 팟캐스트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소비해야 자신이 행복한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너무 써서 문제인 게 아니라, 너무 못 써서 문제다. 결국 쇼핑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돈을 잘 쓰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이다. 목표와 절실함의 순위에 맞춰 소비하라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무엇이 잘 쓰는 삶인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있다. 효율적으로 소비하기보다 잘 쓰는 삶을 살려면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부터 정립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데... 생각하기에는 너무 피곤하다. 치킨은 가깝고 내 집 마련은 멀다. 치킨을 2만 마리 먹어야 내 집에 가까운데, 치킨을 2만 마리 먹으려면 하루에 한 마리씩 먹는다고 해도 54년이 걸리고.... 관두자.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소비 기술은 조금 나아진 편이다. 돈을 쓰는 법을 크게 배운 건 원인을 알 수 없게 아픈 이후였는데, 아껴봤자 병원비로 다 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택시를 많이 타고 밥도 잘 챙겨 먹었다. 덧붙여 택시를 타야 택시기사님도 좋고 내수 경제는 활성화된다고 자기 위안을 삼는다. 쇼핑 기술은 없어도 그나마 잘하는 건 어딘가 있겠지. 쇼핑을 잘하는 여러분 덕에 제가 멸종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책도 열심히 보시고 열심히 소비해 주세요.
글 | 정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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