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시간, 구체적인 사랑 유진목의 『연애의 책』을 읽고
사랑이라는 사건은 결코 현재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과거에 속하거나 미래에 속할 뿐이다. 눈앞에 ‘너’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밀려드는 감정과 한없이 예민해지는 감각 속에서 일종의 트랑스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이란 그것이 지나간 뒤에, ‘너’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사건이며, 앞으로 만날 ‘너’를 생각하며 미리 겪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시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된다.
유진목의 시집 『연애의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랑이 결국 시간에 관한 것임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이 책을 손에 들면 연애의 책이라고, 사랑에 관한 책이라고 제목에서 스스로 밝히는 이 대범함이 어쩐지 정겹게 느껴지고, 책을 펼쳐 거기 적힌 시들을 따라 읽다 보면 거기 적힌 사랑의 기억들이 마냥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 많은 사랑의 시간들을 소박하고 다정하게, 쓸쓸하고 서늘하게 적어나가는 책이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며 감탄하게 되는 것은, 시인이 꼼꼼하고도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우리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그리는 방식에 있다.
나는 곧 열두 시가 된다
보리차를 끓이고
미역을 불렸다
오이는 싱싱하다
아이의 이름을 생각하고
양치를 하고
쪼그려 앉아 밑을 닦았다
천장이 무너진다
그런 뒤에도 시계는 조금 더 갔다
- 「사이렌의 여름」 중
차갑게 식히기 위해 보리차를 끓이고, 미역을 불리고 오이를 썰며 오이냉국을 준비하는 여름날의 풍경이다. 뜨거운 빛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정오의 이 한 순간, 누구의 아이인지, 어느 시절의 아이인지 드러나지 않는 아이의 이름을 생각하며 양치를 하고, 밑을 닦는 그 시간들을 섬세하고 일상적인, 그러면서도 매우 낯선 정물들을 불러들이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이 시간과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에 놀랐다. 여름을 살아가는 일을 이처럼 선명하고도 낯설게 표현하는 작품을 아직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가 그리는 여름은 매우 구체적인 여름이면서도, 아직 표현된 적 없는 삶의 장면들을 예민하게 끌어올린 여름이고, 그 장면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서늘하고 쓸쓸한 감각과 정오의 뜨거움이 선명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여름이다. 그 서늘함과 뜨거움 사이에 놓인 ‘나’가 아주 조금 무너져 내리는 순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 올리는 이 감각에 놀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 여름은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여름은 이미 지나가버린 여름 같고, 다른 기억들이 모두 희미해졌는데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의 작은 기억 속 여름 같다. 오이와 미역과 보리차와 쪼그려 앉아 밑을 닦는 일 등으로 표상되는 이 여름은, 결코 육박하는 눈앞의 여름일 수 없다. 지금 이 시에서 육박해오는 것은 그 여름날의 기억이고, 그 여름날 품었던 위태로운 마음이다.
그것이 이 시인이 사랑을 그리는 방식이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부서져버린 어느 순간을, 그것이 모두 끝나버린 뒤에야 겨우 삶의 작은 구체적 사물들에 기대어 떠올리는 일. 그것이 우리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심지어 시인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랑과 삶에 대해서도 그것을 회고의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때 나는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고립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략)
그 사이 나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노인이 되었지요 나도 한때는 살갗에 이렇게 많은 주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말입니다
-「밝은 미래」 중
노인이 되어 이 세계를 견디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이 시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밝은 미래’다. 이 책에는 이처럼 기묘한 역설들이 가득하다.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고, 삶에 대한 밝은 전망과 비관이 뒤섞이고, 사랑과 고독이 뒤섞이며, 이 ‘연애의 책’을 구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지금 다시 살고, 오지 않은 미래를 과거처럼 기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현재가 없고 내면이 없는, 이 혼란스러운 침착함이 우리의 사랑이라고.
지금을 끊임없이 상실해나가는 우리의 사랑과 삶 속에서, 부표처럼 떠오르는 사물의 작은 역사들에 기대어 이 사랑과 삶을 견뎌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연애의 방식이라고. 그야말로 『연애의 책』에 걸맞은 아름다운 답안이다.
글 황인찬(시인). 사진 한정구(AM12 Studio)
유진목 저 | 삼인
유진목의 시집 『연애의 책』은 절제된 유머 감각이라 할 만한 것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 시인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웃음의 요소를 찾아내고 이를 시로 육화하는 솜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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