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군',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운 이는 누구인가
비극적인 현대사의 몇몇 순간을 연상시킨다
한국 영화의 사극은 '조선' 시대 배경이 보통이다. 일단 삼국이나 고려 시대와 비교, 사료가 충분해 이야기를 만들기에 용이하다. 많은 이가 브라운관으로 매일 같이 방영되는 사극을 보며 조선 시대 배경의 드라마에 익숙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정치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사극은 우회적인 방식으로 정치 의사를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스피커다. 조선 시대 내내 왕을 중심에 두고 두 패로 갈려 당권 싸움에 매달리던 시대적 상황은 묘하게 현재와 닮았다.
정윤철 감독('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 '좋지 아니한가'(2007), '말아톤'(2005))이 연출한 '대립군'의 배경은 1592년 임진왜란이 막 발발하던 때다.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불시의 침략에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다. 선조는 일본군의 칼에 목을 잃기 싫다며 중국 명나라로의 피난 길을 재촉한다. 공석이 된 조선의 임금 자리는 '분조'라고 하여 조정을 반으로 나눠 다스리는 개념으로 어린 광해(여진구)에게 맡긴다.
떠난 선조를 대신해 조선을 추슬러야 하는 광해는 불시에 맡게 된 분조 자리가 두렵기만 하다. 아직 어려서 자신 한 몸 돌보기도 힘든데 신하를 이끌고 의병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야 한다니 몰래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선조가 명으로 떠난 사실이 전국에 급속도로 퍼지면서 민심 이반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도움을 얻기도 쉽지 않다. 남의 군역을 대신하며 먹고 사는 '대립군'들을 억지로 호위병으로 끌어들인 광해 일행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들어간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전란의 상황은 여러 모에서 비극적인 현대사의 몇몇 순간을 연상시킨다. 선조가 명으로 도망치는 길을 서두르겠다며 부러 배를 뒤집어엎어 백성의 피난 길을 막았다는 대목.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북한군의 공격을 피하겠다는 이유로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광해를 옆에서 보필하던 조정 신하들이 피난 길에 주린 배를 채우겠다며 힘없는 백성의 식량을 무력으로 뺏으려는 광경.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민낯을 만천하에 드러낸 전(前) 정권 기득권 세력의 추악한 욕망과 맞닿아 있다.
안 그래도 '대립군'의 대사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지옥'이다. 대립군의 수장 토우(이정재)는 동료들과 함께 광해 일행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고 공을 세워 비루한 팔자를 고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그러거나 말거나 광해 옆에서 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벼슬이 높다는 이유로 대립군들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신하들의 행태에 지옥 같은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오히려 조선의 멸망이 가까워 보이는 상황에서 같은 민족으로부터 최소한의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느니, 일본군에 잡히는 것이 더 낫겠다는 이가 하나둘 목소리를 높인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자 광해를 협박하고 피난 길을 이탈해 일본군에 스스로 포로가 되는 이들이 늘어나는 양상으로 나아간다.
정윤철 감독이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서 특별히 '대립군'에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역을 피하겠다며 큰돈을 들여 대립군을 내세우는 이들은 당연히(!) 상류층에 속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고위층의 자제인 셈이다. 신분 사회가 철저한 당시 조선에서 백성들이 먹고 살려는 방편 중 하나는 대립군처럼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돈으로 목숨을 거래하는 사회는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러니까, 대립군이 횡행하던 당시의 조선은 말 그대로 '헬조선'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헬조선은 언제부턴가 다시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며 먹고살기 힘든 현실을 자조하는 단어로 널리 퍼진 상태다.
과장하자면 99%의 우리는 기득권 1%의 대립군이다. 대학생들이 살인적인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동안 대통령 측근의 딸은 부모 잘 만났다는 이유로 시험도 보지 않고 좋은 성적을 얻었다. 선임병의 구타로 자살한 군인의 유가족이 죽음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해 눈물짓는 동안 어느 고위층 자제는 코너링이 좋다는 이유로 꽃보직(?) 운전병으로 근무하며 혜택을 누렸다. 밤샘 촬영과 제작진의 폭언을 이기지 못한 조연출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모자라 관행이라는 이유로 죽음마저 무시당하는 동안 제작사는 한류에 편승해 돈잔치를 벌이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런 게 나라냐, 자조하기에도 아까울 만큼 국가 기능이 엉망인 한국을 되살린 건 광장에 모인 수십, 수백, 수천 만의 촛불이었다. 이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득권이 국가의 운명을 이웃 국가에, 강대국에 팔아먹고 배를 불리는 동안 바닥의 민심이 목숨을 걸고 전면에 나서 지금의 한국을 일구었다. 그러니까, '대립군'을 제목으로 내세운 배경에는 영웅으로 기억되어야 하지만,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누락되어온 99%의 얼굴을, 이름을 잊지 말자는 취지가 기저에 깔려있다.
광해는 신하가 배가 고프다며 백성의 식량을 뺏으려는 광경을 지켜보고는 역정을 내며 한민족끼리의 싸움을 멈춘다.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부족한 식량을 나눠 먹고 나자 자신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대립군 중 한 명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마치 화해를 청하는 듯한 분위기다. 아니나 달라,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광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밥을 먹게 해준 백성들에게 이렇게나마 보답해주고 싶다는 요지의 말을 남긴다. 그런 임금에게 괜히 돌을 던져 분란을 일으킬 백성은 얼마 없을 것이다.
나라님이란, 대통령이란, 리더란 이런 거다. 자신의 몸과 안위와 스타일을 챙기기 이전 민심을 헤아리고 눈높이를 맞추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런 시간을 퇴적하여 좋은 국가,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토양으로 마련한다. 그것은 역사가,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맞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증명한다. 그 당연한 메시지를 전하는 '대립군'이 왜 그렇게 마음을 건드리나 생각해봤더니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당연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온 까닭이었다.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을 닦고 다시 출발이다.
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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