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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시집

에디터, 편집자, 작가는 어떤 시집을 추억할까

시인이 살고 싶은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시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나는 시라는 장르를, 그리고 시인이라는 존재를 아끼게 되었다.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시집

곧 12월입니다. 춥습니다. 손끝이 시리고 덩달아 마음도 시립니다. 편의점에는 호빵을 팔고 거리에서는 붕어빵을 팝니다. 캔 커피를 들고 있으면 손이 따뜻하고 호빵을 먹으면 속이 든든합니다. 그런데 마음은요? 어떻게 따뜻해지나요? 라고 묻는 분께, 시집 한 권을 건네고 싶습니다. 날카롭게 현실을 말하는 시는 있지만,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시집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엔 누군가에게 시집 한 권을 선물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사진가, 극작가, 시인, 편집자, 에디터, 출판사 대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시집이 있습니까?”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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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시집 한 권을 보내줬다. 사람들이 러시아인지, 남미인지도 잘 모르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류블랴나'라는 유럽의 작은 도시에서, '박준'이 시인인지, 헤어 디자이너인지도 잘 모르고 살고 있던 나는, 갈색 표지의 단정한 시집을 받아 들고 웬일인지 바로 읽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혹은 독자들처럼 "한번 아름다워 보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워질 수 없었고, 대신 제대로 슬퍼졌다. 아파하며, 길을 걷고, 병원에 들렀다가 다짐하고, 미인을 만나고, 책을 읽으며, '당신'을 만나고, 심야택시의 뛰는 말을 보다가, 조그맣게 낙서도 해보고, 가족의 휴일을 지켜보다가 결국 홀로 남아 또 슬퍼졌다. 하지만 그 '슬픔'이 나쁘지 않았다. 아름답고 건조한 슬픔. 잘 말린 꽃잎 같은, 향기가 날 것만 같은. 그래서 가끔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들이 생각날 때면, 이 시집을 펼친다. 그럼, 아름답게 슬퍼지는 느낌이 든다. 뜨거운 물을 마시지 않아도 속이 살짝 '따끔'해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강병융(소설가)

류시화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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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사막을 건널 수 있을까? 한 때 시를 찾아 헤맨 적이 있다. 17년간 몸담았던 제도권 학교를 떠나, 내 가슴이 가리키는 들판의 학교로 향했다. 그곳 교사들은 아이들과 함께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교과서만을 읊조리느라 오랫동안 시를 잊고 있었던 나도 꿈처럼 수업을 열었다. 무뎌진 감수성으로 갈팡질팡 시를 읽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내 가슴을 보았다. 한 줌 강물도 못 되는 나는 '흔적도 없이 모래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두려움에 떨었다. 어둠이 깊어만 갔다. 상처 입은 밤이면 시집 속에서 머리 하얀 현인들이 튀어나와 '바람에게 너 자신을 맡겨라.'라고 끝없이 충고했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결국 학교를 떠났다. 그래도 현인들은 밤마다 '사막의 지혜'를 읽어주었고, 시간이 흐르자 시처럼 나도 '자신을 증발시켜 바람의 다정한 팔에 안기는' 법을 배웠다. 수증기 머금은 구름이 되어, 학교 너머 '강이 여행하는 법'이 적혀 있다는 사막을 여행할 수 있었다. - 오인숙(사진가,전직 교사)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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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에서 연극 『데리러 와줘』를 보고 돌아오던 길, 탁한 연보랏 빛의 시집 한 권이 떠올랐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맞춤법상 자꾸 '나는'으로 교정되지만 고슴도치 아가씨는 분명 '날으는' 중이다) 연극에서 절절 끓는 기름통 속에 스스로 뛰어드는 여자를 본 탓인지 '이미 죽은 내가 엄마아빠의 뜯긴 살집에 손을 넣어 큼직큼직하게 살점을 떼어'내어 살수제비 끓인다는 시가 떠오른 것이다. 이 시집을 처음 읽던 날의 충격, 책장이 누렇게 닳도록 이 시집을 끼고 다니던 나날의 기억들도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되돌아왔다. 끔찍하도록 노골적인 1인칭 문장들은 실험극 무대에 선 배우의 독백 같기도, 스웨그(swag) 넘치는 래퍼의 랩 같기도 하다. 언제 읽어도 유효하다. 지금 여기의 악몽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씩씩한 태도로 관통 중인 화자에게 사정없이 마음을 빼앗긴다. -김슬기(극작가)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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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라도 시인이라는 정체 아닌 정체가 밝혀지면, 사람들은 꼭 들꽃의 이름을 물어온다. 꽃이나 나무 이름은 하나도 모르는데, 난감해하며 뒤통수를 긁적이면 또 물어온다. 시상이 어느 순간 강렬하게 떠오르는지. 역시 당황하여 입 꼬리를 가까스로 들어 올리면, 이윽고 이어지는 탄성. 시인이라니, 대단하시네요! 그러나 시인은 생태 연구자가 아니고, 낭만주의의 화신도 아니며, 윤리적 지도자는 더더욱 아니다. 굳이 나름의 정의를 내리자면 시인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불편함의 정서를 포악하리만치 내뿜는 시집이 바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다. 아름다움도 선량함도 별로 없는 세계, 그 세계에서 우적우적 햄버거를 먹는 인간. 시가 발설하는 불편함은 때로 한 세대를 건너뛰기도 하는데,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 바로 그렇다. 2015년의 불편부당함이 입 속의 패스트푸드처럼 느껴질 때, 이 시집을 연다. 이 괴상한 포만감은 뭘까. 시가 주는 아름다움? 시가 행하는 기적? 시가 가진 윤리성? 그런 거 조금도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집이라서, 그렇게 쓰고 싶어서인지, 그리고 계속 실패할 것만 같은 예감에, 이 시집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서효인(시인)

오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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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그지 같은 현실이지만, 여러 생각 안하고 정말 내가 애정하는 시인을 불러볼까 한다. 온도가 맞는 친구와 연애를 하고 식성이 비슷한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고 숨쉬길 좋아한다. 오은 시인은 페이스북에서 처음 알았다. 종종 인용한 구절이 담아내는 분위기에 감응했다. 이 주홍색 시집을 만난 날, 나는 편안함의 왕(Kings Of Convenience)의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시인의 말과 음악이 절묘한 공기를 일으켜 내 몸을 가늘게 떨리게 했다. 동시에 미소 지었다. 예컨대 이런 자기소개 글을 보고. "딴생각을 하고 딴청을 피울 때 가장 행복하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라는 책이었나. 머리는 제목만 기억하지만, 몸은 오감이 반응한 걸 기억한다. 오은의 시집은 '내 영혼을 위한 활자 스프' 같다.(윽, 징그러) 오은 시인님, 저도 이 분위기 참 사랑합니다. -강태영(동아시아 편집자)

 



고형진 『정본 백석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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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백석과 그의 시는 패션지 피처 기사에도 수없이 소재로 등장했고, 영화 『모던보이』의 남자주인공인 배우 박해일의 헤어스타일은 백석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기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몇 년 전에 『정본 백석 시집』이 출간되었다. 이는 평안도에서 태어난 시인 백석의 모든 작품을 작품 발표 순서대로 구성했고 고어, 구어, 사투리, 고유명사를 해석한 책이다. 여러 편의 시를 읽다 보면 백석은 시인일 뿐 아니라 위대한 스토리텔러이며, 생활문화와 정서를 문자로 표기한 사관이자, 감각적인 트렌드셰터임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조사 외에 거의 모든 말이 생소한 이 시들을 읽다 보면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절로 눈을 뜨게 된다. 사투리를 해석하기 위해 평안도 출신 노인들은 물론, 다양한 어휘와 문맥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한문학자, 지리학자, 역사학자, 원예학자 심지어 노어노문학과 교수까지 참여해서 고증을 했다고 하니 한 권의 시집에 이 정도의 품이 들어갔다는 것도 놀랍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삶의 깊이가 달라졌음인지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4D 영화처럼 모든 텍스트가 영상이 되어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며 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으며 타향살이의 설움이, 「여우난골족」을 읽으며 식구들 많은 떠들썩한 시골집에서 깊어가는 겨울밤이 그대로 느껴진 것은 과연 나뿐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을 정도다. -이화정(에디터)

이문재 『지금 여기가 맨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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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를 별로 읽지 않았다. 시인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편견이 있었다. 시인은 직장인의, 노동자의 삶을 잘 모를 것이라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을 거라는. 이런 편견을 가지고 이문재 시인을 우연히 만났다. 그에게 반했다. 세상에 화가 나 퉁명스러운 모습. 대학에서 교수로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는데도 시민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는 행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글쓰기의 힘에 대한 시인의 순수한 믿음 그리고 일하는 자로서의 성실함. 그의 최근 시집을 읽었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팍팍한 삶을 사는 우리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그의 언어는 잘 직조되어 정갈했다. 이성의 언어였지만 공감이라는 정서로 마음에 다가왔다. 그리고 시인이 살고 싶은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시라는 것은 이런 거구나. 나는 시라는 장르를, 그리고 시인이라는 존재를 아끼게 되었다. -김정희(로고폴리스 대표)

 

 

 

글 | 엄지혜사진 | 이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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