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파도소리, 들어본 적이 있나요?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 읍천 포구
읍천항 갤러리
울산에서 감포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동해안로)를 통해서 읍천 포구로 들어섰다. 동해의 일출을 기대하며 이른 아침에 도착했지만 해는 구름 뒤에 숨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동해의 수평선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가까이 보이는 두 개의 등대가 포구를 껴안고 있어서인지 고요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감성돔, 돌돔, 벵에돔 등 낚시꾼들이 손맛을 보려 즐겨 찾는 곳이라는 데, 과연 낚싯대를 든 아저씨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낚시에 소질이 없는 내가 동해의 어항을 찾은 이유는 ‘읍천항 갤러리’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포구에 자그마치 120여종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니, 일단 떠나고 본 것이다.
바다와 가까운 평지에는 허리 높이의 간이 비닐하우스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빨간 고추가 해풍에 말라갔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곁을 지키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운 식당에서 대구탕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벽화들을 구경하며 포구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을 때였다. 해녀 복장을 한 할머니가 해진 빈 그물을 어깨에 메고 자신이 모델이 된 벽화 앞을 걸어가는 걸 보고야 말았다. 할머니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벽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건 분명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지도,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어볼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읍천 포구가 부려놓은 마술에 정신을 뺏길 뿐이었다. 벽에다가 예쁜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고만 여겼는데, 벽화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청새치를 잡아 올리는 노인, 거북이와 함께 해저를 탐험하는 해녀들,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포구를 지키는 러시아 병정, 일출을 바라보는 강아지, 고래 등을 타고 노는 아이, 천사의 날개, 옥수수를 먹는 다람쥐, 코가 긴 피노키오, 벽에 소변을 누는 아이 등 색색의 그림은 포구를 진짜 갤러리로 만들어 놓았다.
골목골목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곳은 없었다. 보기 싫은 흉가는 도화지로 쓰이고, 페인트가 벗겨져 나간 오래된 담장은 캔버스가 되었다. 돌담과 담쟁이넝쿨, 우편함과 수챗구멍은 그림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입체적인 회화의 재료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읍천 포구를 살아 있게 하는 건, 매일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올리고 밧줄을 당기는 사람들이었다. 읍천의 벽화는 어민들의 그림자에 윤곽을 그려 넣고 색을 칠해둔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화가들이 놓고 간, 읍천에 대한 마음 일지도. 싱싱한 해산물로 그물이 두둑해지면, 돌아오는 길에는 그림자도 살이 쪄 있겠지.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지만, 그림자는 할머니를 놓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왕릉으로 한 발자국
읍천리는 마을 서쪽 언덕에 대나무 밭이 있어 죽전(竹田)마을라고도 불렀다. ‘죽전(竹箭, 대나무를 깎아 만든 화살)’마을은 아닐까.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된 것은 읍천이 행정구역상 경주에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읍천 포구에서 6km 떨어진 곳에 문무대왕릉이 있었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아들인 문무왕은 삼국이 통일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왕으로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왕의 유언을 따라 동해변의 큰 바위에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있는데, 그 바위가 바로 대왕암이다. 봉길 해변에서 바다 쪽으로 200m정도 떨어진 곳에 낮게 펼쳐진 이 자연석은 동해의 성난 파도와 맞부딪혀도, 육지 방향으로는 언제나 잔잔하다고 한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유언처럼 신비한 자연현상에 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의 이목을 끄는 곳이다.
문무대왕릉은 신라의 무덤 가운데, 유일한 수중릉이다. 그 특이한 형태에 아직까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태양이 석굴암의 부처님 이마의 구슬에 반사되면 그 빛이 이곳까지 닿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문무왕은 호국을 기원하며 동해에 감은사를 짓던 중 큰 병을 얻게 되어 그 뜻을 신문왕이 이어받았다. 신문왕은 문무왕이 승천할 수 있도록 감은사의 금당 밑까지 수로를 파서 바닷물이 들어오게 했다고 한다. 감은사 앞의 언덕에는 동해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견대가 지어져 있다. 신문왕이 수시로 들러 대왕암을 보고 갔다고 하니, 그 마음이야 이뤄 말할 수가 있겠는가.
파도와 바위의 진한 포옹
제주도 올레길, 부산 갈맷길, 동해 해파랑길, 남해 바래길 등 바다를 동무삼아 포구로 해안으로 걸을 수 있는 길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나는 언젠가 다시 걷게 될 그 길의 목록에 또 하나의 장소를 추가해야만 했다. 읍천 포구의 등대 공원터에서 출발해서 출렁다리 - 부채꼴 주상절리/주상절리 위의 소나무/몽돌 길 - 위로 솟은 주상절리 - 누워있는 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를 이어놓은 ‘주상절리 파도소리 길’이 바로 그 길이다.
주상절리는 마그마가 냉각이 진행되면서 생성된 바위의 단면의 형태가 육각형 내지 삼각형으로 긴 기둥 모양을 이루고 있는 절리로 주로 제주도 해안의 절벽에서 발견하기가 쉽다. 용암의 두께/온도/냉각속도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발달하게 되는데, 읍천에는 수평으로 펼쳐진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읍천의 주상절리는 심미적 가치뿐 아니라, 화산활동을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아무래도 파도와 바위의 진한 포옹은 귀로 느끼는 게 더 좋은 거 같다. 파도가 주상절리를 껴안는 풍광이 소리로 변하는 순간, 마음이 뻥 뚫리고 머리도 맑아진다. 무엇보다 자연이 들려주는 멋진 연주를 언제고 무료로 들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게 어디 있겠는가. 읍천은 볼거리도 많지만 눈보다도 귀를 더 열어야 하는 포구인 것만 같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에는 벽화 속 주인공들이 말을 걸어올 지도 모른다. 토끼가, 고래가, 어린왕자가. 파도가, 바람이, 정말 어쩌다 보면 문무왕께서도, ‘자네……’하며 속사정을 털어 놓으실 지도. 역사는 이미 지나온 결과물이 아니다. 언제든 역사는 변화하며, 그 거대한 혼란 속에서 또다시 현재화되길 멈추지 않아야 한다. 파도가 그러했듯, 쉼 없이 어루만지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경주의 파도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글ㆍ사진 | 오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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