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하리의 ‘예전의 그 소녀’
뮤지컬하면 멋진 남자배우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20~30대 싱글 여성이 가장 주요한 소비층을 형성하고 있는데다 아이돌 스타들의 무대 진출이 늘어나면서 10대 K팝 팬들의 팬덤 현상이 라이브 퍼포먼스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무대와 만나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 배경이다. 조승우나 김준수(시아준수) 등이 출연하는 공연의 티켓이 예매개시 몇 분 만에 서버가 다운됐다는 부류의 가십 기사들은 뮤지컬의 붐을 확산시키는 데에 좋은 호재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변화 조짐이 느껴진다. 남자 주인공이 아닌 여자 주인공이 이야기의 전면에 도드라지는, 이른바 여톱 뮤지컬의 확산과 인기다. 그렇다고 주요 관객층이 변했거나 스타의 지형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관극 체험이 늘고 많은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 여성관객들의 눈길이 멋진 이성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에도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감할 수 있는 여성들의 정체성 찾기와 간접체험을 통한 대리만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엘리자벳>, <위키드>, <마리 앙투와네트>에 이어 창작 뮤지컬 <마타하리>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연말쯤 뮤지컬의 흥행 지도가 어떻게 변했을지가 개인적으로도 호기심이 간다.
뮤지컬 <마타하리>는 일련의 오스트리아 뮤지컬을 국내에 소개해온 제작사 EMK가 인터파크와 손잡고 설립한 써클 콘텐츠가 야심 차게 준비해온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다. 국내 제작사가 만든 작품이나 엄격하게 구분하면 창작 뮤지컬이라 할 수 있지만, 제작진의 면면은 글로벌 크리에이티브가 참여한 화려한 진용을 자랑한다. 우선 연출과 안무는 브로드웨이에서 활약 중인 제프 칼훈(최근 우리나라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뉴시즈>의 브로드웨이 연출을 맡았었다)이, 음악은 ‘지금 이 순간’(지킬 앤 하이드)으로 유명한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황태자 루돌프>, <몬테 크리스토> 등의 작사가 잭 머피가 참여했다. 한국 크리에이티브로는 무대 디자인의 오필영, 조명 디자인의 구윤영, 음악 감독의 김문정 등이 함께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주얼적인 완성도이다. 사실 뮤지컬을 보는 이유를 물으면 춤과 노래가 좋아서라는 대답을 가장 흔하게 듣게 된다. 하지만 당연히 뮤지컬의 재미가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각적인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특수효과나 새로운 공간 연출을 통해 현장성과 판타지를 동시에 구현해내는 라이브 퍼포먼스로서의 무대용 뮤지컬만의 묘미다.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무대는 웬만한 마술쇼보다도 흥미로운 볼거리를 선사하곤 한다. 뮤지컬 <마타하리>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중스파이 혐의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여인이 겪는 사랑과 음모에 대한 이야기를 기본으로 ‘화려한’ 볼거리를 ‘화끈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파리 최고의 화류계인 물랭 루즈의 무희가 주인공인 탓에 무대에서는 관능적인 의상과 안무, 성인용 무대 같은 아슬아슬한 재미도 만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탁월한 무대용 특수 효과들이다.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하늘이 쪼개지기도 한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무대에서는 암전 없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수많은 세트와 소품들로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이토록 눈이 호강하는 뮤지컬 작품이 창작물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운 마음마저 든다.
새롭거나 실험적이진 않지만 감성적인 선율은 프랭크 와일드혼 특유의 낭만적인 감상을 잘 전달해준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경험했던 자기 멜로디의 재활용(?)도 이번 작품에선 찾기 어렵다. 메인 롤을 맡고 있는 옥주현과 김소향은 각기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우선, 음악적 완성도는 옥주현이 탁월하다. 특히, 처음 음악을 구상할 당시부터 옥주현을 염두에 두고 곡을 썼다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노래들은 그래서인지 옥주현의 맞춤복처럼 딱 어울리는 느낌을 준다. 반면, 몽환적인 이미지와 여성스러움, 당대 화류계를 휘어잡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김소향이 조금 더 진한 인상을 남겨준다.
마니아 관객들이라면 장면과 상황들은 왠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해설자격인 MC의 등장은 <카바레>나 <에비타>를, 법정 씬은 <시카고>를, 엔딩은 <거미여인의 키스>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물랑 루즈>의 장면들을 연상케 하는 부분도 있다. 다만, 패러디라기엔 너무 진지한 상황과 전개가 다소 당황스럽다. 그래도 국내에선 자주 볼 수 없는 작품들이라 우리 객석에겐 감동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점쳐본다. 일 년에 한두 번 공연장을 찾는 수준의 관객이라면, 이보다 화려한 갈라 콘서트 같은 매력과 볼거리가 또 없을까 싶기도 하다.
단지 국내 시장뿐 아니라 해외진출까지 염두에 둔 작품이라면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다소 느린 듯 차분하게 펼쳐지는 극 전개와 전형적인 멜로구도의 삼각관계의 활용은 40~50대 중장년이 주를 이루는 영미권 관객의 입맛에 잘 소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레타 가르보나 실비아 크리스텔의 영화를 기억하는 올드무비 팬이라면 분명 무대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이 작품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 영화들을 미리 구해 감상하고 공연장을 찾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 될 듯싶다. 한번 도전해보기 바란다.
뮤지컬 <마타하리>의 홈페이지를 찾으면 제일 먼저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바로 ‘예전의 그 소녀’다. 인터넷 상에서는 붉은 색조의 실루엣 이미지가 강렬한 짧은 동영상을 만날 수 있다. 호기심을 자극받게 되는 이 뮤지컬의 쇼스토퍼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노래 ‘어딘가’도 옥주현의 뮤직비디오로 즐길 수 있다. 영어로 노래한 이 버전은 핑클의 걸 밴드 멤버 때와는 전혀 다른 성숙한 여인의 느낌도 물씬 풍겨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인터뷰도 흥미로운 자료다. 아무래도 월드 프리미어 무대이다 보니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 인터뷰는 배우들이 나오지만, 내용 하나하나를 듣다보면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과의 고민과 여정이 보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사진제공 | EMK뮤지컬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