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하리' 옥주현
나를 뛰어넘은 시간
1998년 데뷔 이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 그녀와의 대화는 온전히 뮤지컬로만 채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어느덧 뮤지컬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배우 옥주현. 이렇듯 시간의 힘은 대단한 것 같다. 지난 10년 동안 11개의 작품에 출연하며, 끈기 있게 뮤지컬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그녀. 앞으로의 10년은 또 어떤 시간으로 옥주현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까? 그 시작을 알리는 건 이름부터 매혹적인 여인 마타 하리다. 올 3월, <마타하리>의 세계 초연 무대에 오르게 된 옥주현은, 언제나 그러했듯 또 한 번 자신을 뛰어넘을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명보다 더 큰 사랑
올 상반기 기대작 중 하나인 <마타하리>. EMK뮤지컬컴퍼니가 야심 차게 선보이는 첫 창작뮤지컬에서 옥주현은 일찌감치 주인공으로 낙점되며, 눈길을 모았다. “배우로서 영광이죠. 세계 초연을 하는 거잖아요. 오랜 기간 준비해 온 작품이기도 하고. 아직도 EMK 엄홍현 대표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작품을 만들 수 있게끔, 그동안 힘을 실어줘서 고맙다고 하셨거든요. 그 말이 감동적이었어요. 더욱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라는 뜻을 지닌 ‘마타 하리’, 그 이름에 걸맞게 작품은 화려하지만 비극적인 운명을 살았던 매혹적인 여인의 삶을 조명한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 혐의로 총살당한 미모의 무희 마타 하리다. “마타 하리에 대한 의견이 지금도 분분해요. 어떤 이들은 그녀가 정말 훌륭한 스파이였다고 말해요. 스파이인지 아닌지 확정지을 수 없는 건 그만큼 그 일을 잘 해낸 뜻이라고요. 그리고 한쪽에선 그녀가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죠.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녀가 정말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자였다는 거예요.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존재 같았대요. 비록 천박하고 기구한 삶에 처했지만, 마타 하리는 그 안에서 자신의 고귀함을 유지했어요. 그런 만큼 <마타하리>는 단순히 어떤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비극적인 운명 안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려 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죠.”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마틱했던 마타 하리의 삶. 그녀의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무대는 그녀의 ‘사랑’에 주목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타 하리에게 스파이가 되라고 요구하며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는 프랑스 정보부의 라두 대위의 어긋난 사랑, 이에 반해 마타 하리는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항공 조종사 아르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한다. “마타 하리는 운명보다 강한 여자였지만, 사랑 앞에선 약한 여자였어요. 사실 그녀에게 주어진 삶들이 너무 혹독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다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갔어요. 하지만 사랑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여자였어요. 그 자체만으로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예요. 이렇듯 운명엔 강했지만, 사랑엔 약했던 마타 하리의 모습을 강조하고 싶어요.”
사랑 앞에 자신의 모든 걸 내던졌던 마타 하리. 옥주현은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는 가능할 것 같아요. 마타 하리처럼 위험한 사랑을 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에게 말론 설명할 수 없는 대단한 소통을 느낀 거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도 그래요. 내 영혼의 문을 열게끔 해주는 그 어떤 순간…. 단순히 표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거죠.” 극 중에서 마타 하리는 ‘예전의 그 소녀’를 부르며 이러한 놀라운 감정을 표현한다. “마타 하리가 부르는 ‘예전의 그 소녀’에 특히 공감이 가요. 이 노래는 처음 들었을 때, 임팩트 있는 곡은 아니에요. 들을수록 가슴 아프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노래죠. 절대 사랑을 믿지 않고 너무나 단단한 껍질을 두르고 살았는데, 그게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 온 거거든요.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어떤 위험도 계산하지 않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타 하리처럼!”
뮤지컬로 흐르는 시간들
“지금 10년 후를 떠올리면 참 아득해요. 그런데 돌아보면, 지난 10년은 참 빠른 시간이었어요. 뭘 하고 살았지? 생각이 안 들 정도예요. 그만큼 바빴지만, 알차게 살았던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로 살았던 지난 10년, 그 순간을 떠올리자 옥주현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녀의 말대로 10년은 참 아득한 시간이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옥주현의 첫 무대였던 2005년 <아이다>, 그리고 최근작인 2015년 <엘리자벳>, 그 사이 그녀가 보여준 성장의 크기가 새삼 ‘시간의 힘’을 느끼게 하니 말이다.
“꿈같은 시간이었죠.” 뮤지컬 무대에 첫발을 내딛었던 순간, 옥주현은 그때의 기억을 다시 펼쳐 보았다. “꿈꾸던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긴장도 됐어요. 너무나 부족할 때 큰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내가 이 화려한 무대 안에 어떤 크기로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어요. 좋게 말하면 풋풋했지만, 사실 한없이 부족하고 서툰 존재였죠. 제가 약간 강박증이 있다 보니 처음에는 무대 위 약속들을 지키기 바빴어요. 그러다 무언가 짜릿함을 느낀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어요. 상대 배우, 그리고 앙상블과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이 전해졌을 때, 처음으로 무대에서 감동을 느꼈죠.”
2005년 <아이다>로 데뷔한 후 옥주현은 지난 10년 동안 11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꾸준히 변신을 시도했다. 그런 그녀에게 어떤 작품들이 특별한 기억을 남겼을까? “지난 10년 중에서 세 가지만 꼽으라고요? 저 이런 거 진짜 못하는데….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음…너무 어렵네요.” 매 작품이 특별했기에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곤 찬찬히 지난 시간을 곱씹어 보았다. “우선, 2012년 <엘리자벳> 초연이요. 물론 모든 무대가 큰 도전이고 숙제였지만, <엘리자벳>에선 조금 다른 차원의 중압감을 느꼈어요. 누군가 이미 정해 놓은 노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제가 만들어가는 부분들이 생겼죠. 제가 찾은 복잡한 레시피를 무대 위에 알맞게 구현해 내는 것, 제겐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어요.”
2013년, <레베카> 또한 그녀에게 인상적인 무대였다. “그때 로버트 요한슨 연출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이번엔 옥주현이 너무나 낙심하고 힘들어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요. 우선 연습 시간이 부족했어요. 낮에는 <레베카> 연습을 하고, 밤에는 <황태자 루돌프> 공연을 해야 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역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걱정도 많이 했고요. 그리고 제가 즉흥 연기를 잘 못해요. 고민을 계속하다가 머릿속에 확고해졌을 때 시도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연출님이 조바심이 나신 거예요. 나중에 무대를 보고 저한테 너무 못됐다고 하더라고요. 이럴 거면서 그렇게 걱정을 시켰느냐고. 그런데 전 안 보여준 게 아니라 준비가 덜 되어 있었던 거예요. 제 성향이 조금 양면적이에요. 집에서는 너무 허술하게 사는데(웃음), 일에서는 완벽주의자거든요. 제가 뭔가를 대단히 잘해서가 아니라, 이 일은 고민의 사이즈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잖아요. 사실 내 몸이 부서지는 건 괜찮아요. 그만큼 관객들에게 좋은 무대를 선사해야 하니까. 주어진 무대 안에서 관객들이 그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끔 제가 작품 안에 온전히 녹아들어야 하잖아요.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은 그 과정이 가장 힘들었어요."
같은 해, <레베카>에 이어 옥주현의 비상을 알린 또 하나의 작품 <위키드>도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아주 오랫동안 꿈꿔 온 작품이었어요. 열정, 애정,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었죠. 물론 이 작품 역시 복잡했어요. 디테일하게 짜인 매뉴얼이 있는데, 그 안에서 그 퍼즐을 잘 끼워 맞추면서 자유로워진다는 게 힘들잖아요. 마치 매를 맞는 듯한 압박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진가가 있더라고요. 연습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 고통을 즐기려 했어요. 굉장히 변태 같죠? (웃음) 연습 끝나면 플러스 알파로 (정)선아랑 집에서 합숙도 했어요. 집에 큰 거울이 없어서 밤에 아파트 복도에 나가 큰 창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연기를 맞춰보곤 했죠. 생각해 보면 이렇듯 힘들었던 순간들이 더 끈끈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 같아요.”
즐거운 탐험 그리고 변화
뮤지컬 무대를 오르내렸던 옥주현의 지난 시간. 돌아보면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쉼 없이 만들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시간의 크기만큼이나 그녀의 입지도 단단해졌다. “행복해요. 배우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작품들이 하나씩 주어진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특권이 주어진 거죠. 때문에 물론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그조차 너무 달게 받아야 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제게 지난 10년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어요.”
새삼 궁금해졌다. 과연 뮤지컬의 어떤 힘이 그녀를 이토록 오랜 시간 끌어당긴 걸까? “뮤지컬은 음악이 있고, 이야기가 있잖아요. 한 인물이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그 감정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것 자체가 제 안에 무언가를 잘 이끌어내 줘요. 이런 탐험이 정말 즐거웠고, 그만큼 더 잘할 수 있도록 스스로 박차를 가하며 살았죠. 모든 합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무대 위 이야기와 음악을 잘 이끌어 나가는 일원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지난 10년이 그러했든, 옥주현은 앞으로도 뮤지컬과 함께 즐거운 탐험을 이어갈 것이다. 흥미로운 건 나아가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지금도 간간이 레슨을 하고 있어요. 물론 제가 잘나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건 아니고요. 제가 부족할 때, 연마하면서 거듭났던 순간들이 있거든요. 그동안 많은 것을 시도하고, 배우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어요. 직접 경험한 만큼, 그 부족함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잘 알아요. 때문에 그것을 전수하는 것 또한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나 혼자 즐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시행착오를 덜 겪게끔 돕고 싶어요.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무대 위 다양한 발성법들을 전해 주면 좋겠어요.”
물론 자신의 뮤지컬 경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무대를 계속 펼쳐 보이는 꿈을 잊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나의 캐릭터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맡은 건 참 잘한 선택이었어요. 센 역할 대신 연약하거나 예쁜 역할만 했다면, 지금쯤 앞날이 좀 걱정됐을 거예요. 사실 제가 워낙 다양함을 좋아하거든요. <마타하리> 이후에 맡게 될 역할도 굉장히 느낌이 달라요. 마타 하리를 하고 나서 이 역할을 맡는다고? 이렇게 놀랄 만한 캐릭터거든요. 앞으로의 10년 또한 이렇게 계속해서 다양함을 오가고 싶어요. 무대에서만은요! ‘아, 옥주현이 저런 걸 하는구나!’가 아니라 ‘온전히 또 다른 사람이 되었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요. 이런 모습을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보여드리고 싶어요.”
글 |나윤정 사진 |김호근 스타일링 | 백지혜 헤어 | 송지희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9호 2016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