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을 탄생케 한 정미의병 사진을 찍은 종군 기자 프레더릭 아서 메켄지
2018년 여름에 시작해서 가을 초입까지 방영한 tvN의 24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이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 드라마입니다.
영국 데일리 메일 종군기자 프레데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한 의병들, 1907년 |
위 사진은 세대가 변하고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국사책에 실려 있는 사진으로 보통 '정미의병' 사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 사진은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역사가 조선시대의 무능한 위정자들도 기회주의자인 친일파가 만든 역사가 아닌 이름 모를 의병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역사를 지향함을 잘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시나리오를 쓴 김은숙 작가는 이 이름 모를 의병들의 사진을 보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서 이 사진을 보고 의병을 소재로 만든 드라마가 <미스터 션샤인>입니다.
김은숙 작가는 구한말 정미의병을 촬영한 종군 사진기자의 실명을 드라마를 통해서 소개를 합니다.
종군 사진기자는 정미의병들을 촬영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영감을 준 이 정미의병 사진을 촬영한 종군 사진기자는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년 ∼ 1931년)입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이분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실명인 매켄지로 나옵니다.
영국 데일리 메일 극동 특파원이었던 프레더릭 매켄지
프레더릭 매켄지는 1869년 3월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난 후 1900년도에 영국 데일리 메일에 입사한 후 영국과 미국에서 기자 생활을 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데일리 메일의 극동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도착합니다. 매켄지는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러일전쟁 취재와 함께 대한제국의 풍전등화와 같은 현실을 알게 됩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 시베리아를 거쳐서 1905년 영국으로 귀국했다가 다음 해인 1906년에 또 다시 데일리 메일 특파원 자격으로 다시 대한제국에 옵니다. 1년 밖에 안 지났지만 대한제국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제국이 승리하자 일본은 고종을 협박해서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합니다. 일제는 대한제국 곳곳에서 제국주의의 만행을 저지르게 되고 이를 목격한 매켄지는 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프레더릭 매켄지는 자신이 목격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보고 듣고 사진으로 촬영한 내용을 엮은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Korea)>를 1908년에 출간합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불필요한 살육과 사유재산권을 마구 휘둘러 농민들의 땅을 도적질 하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매켄지는 1907년 의병 활동을 취재하기 시작합니다. 1907년은 제 3기 의병 활동 시기로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입니다. 매켄지는 양구, 원주, 제천, 홍천 등지의 농민 중심의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곳을 취재합니다. 이 의병 활동 취재 기록기는 그의 책 <대한제국의 비극>의 15장 의병을 찾아서, 16장 일본의 만행, 17장 폐허가 된 제천, 18장 의병과 함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병 활동 취재는 위험지역이라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 등의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쉽지는 않았습니다. 일제는 대한제국 내륙을 여행을 위한 여권 발급도 해주지 않고 신변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까지 했습니다. 또한, 신변 안전을 이유로 호위병을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탐탁지 않았습니다. 호위병을 데리고 의병을 취재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매켄지는 시베리아로 떠나는 것처럼 하고 10월 서울을 탈출합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폐허가 된 이천 부근의 한 마을, 1907년 |
하루 23km에서 40km를 걸어서 이천 부근의 마을에 도착한 매켄지는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발견합니다. 이천에서 충주로 가는 길가 마을들도 참혹하게 파괴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만행이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제가 파괴한 마을들은 의병들이 활약한 마을입니다. 지형지리를 잘 몰랐던 일본군은 산에서 활약하는 의병들에게 큰 곤혹을 치릅니다. 이에 일본군은 추가 병력을 배치하고 마을을 파괴해서 의병들의 근거지를 송두리째 없애는 전략으로 대응했습니다. 매켄지가 충주, 제천, 원주로 가는 길가 마을들은 관아와 절을 제외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매켄지는 경기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에서 드디어 의병을 만나게 됩니다. 한옥 마당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눈앞에서 의병과 대면하게 됩니다. 의병에게 포위되어서 죽을 뻔했지만 영국인이라고 말해서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그가 <대한제국의 비극>에 쓴 의병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의병부대의 전초병들, 1907년 |
의병들의 행색은 초라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있던 의병들을 보고 매켄지는 이 사람들이 일본군을 곤혹스럽게 만든 사람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자신에 찬 미소에서 그들의 동포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굳은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5~6명의 의병들이 마당에 들어서더니 매켄지 앞에서 열을 지어서 인사를 했습니다. 모두 18~26세 사이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이중 한 청년의 얼굴이 잘생기고 훤칠했는데 구식군대의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군복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누구도 가죽 장화를 신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허리에는 집에서 만든 무명의 탄대가 매달려 있었고 탄환은 반쯤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 서 있는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아마 잘못된 생각이었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동포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매켄지가 쓴 <대한제국의 비극>은 총 10장의 사진이 담겼습니다. 의병 사진도 있지만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전하는 일본군 사진도 있습니다.
또한 일본군에 의해서 폐허가 된 주막집과 마을, 10살 된 딸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 당하자 그 옆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도 담겨 있습니다.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는 종군 사진기자였고 그는 일제의 협박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대한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의병들을 촬영했습니다. 이게 바로 기자정신입니다. 포탄이 터지면 모든 사람들이 포탄이 터진 반대 방향으로 달리지만 사진기자와 구호요원만 포탄이 터진 방향으로 뛴다고 하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던 대한제국을 매켄지라는 종군기자가 기록을 했고 우리 역사책과 국사책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이 종군 사진기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의병들의 실체를 글로만 배웠을 겁니다.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도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대한민국은 의병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나라입니다. 결코 친일파가 떵떵거리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어가야 하는 의무가 우리 후손들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