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요환의 한 수
국내 e스포츠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단 한 사람, 바로 임요환. 그는 1990년대 후반 PC방 열풍을 주도한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프로게이머로 활약하며 수많은 방송 출연과 청와대를 방문하며 음지 문화였던 컴퓨터 게임을 대중 스포츠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프로게이머 최초로 억대 연봉을 받으며 게이머가 직업으로 인정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 2013년 은퇴를 선언했다. 그 뒤 행보는 더욱 놀라웠다. 임요환이 택한 제2의 직업은 바로 프로 포커플레이어. 과거 홀대받던 게임산업에 게이머로서 첫발을 내딛던 그때와 비슷한 행보였지만 많은 이가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콘텐츠를 대중화한 임요환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예상컨대 그의 능력이 곧 빛을 발휘할것 같다. 얼마 전 그가 캐나다에서 인공지능(AI) ‘딥스택’과의 포커 대결에서 전승을 거뒀다. 임요환은 “앞만 보고 달려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는 게 도전이다, 일부러 부정적인 사례를 참고하며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라며 승리 소감을 밝혔다. 많은 이가 십 년 넘게 궁금해하던 임요환의 게임 전략 ‘제1법칙’은 바로 직진이었다.
평생 직업을 찾은 황제
임요환과 인터뷰를 나눈 곳은 모바일 게임업체 미투온의 본사다. 그는 포커플레이어를 겸하며 이곳의 홍보이사로 재직 중이다. 자택인 경기도 김포에서 강남으로 출근하는데 차가 너무 막혀 살짝 늦게 출근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유가 묻어났다. 바로 AI와의 포커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기 때문. 내막을 살펴보니 이번 대결은 회사와 방송국의 조작(?)에서 시작한 경기였다. 임요환은 ‘포커에 대한 다큐를 촬영 중이라 유럽의 유명한 포커 선수와 대결을 해달라’는 요청에 승낙했고, 이후 캐나다에 도착해 상황이 이상한 걸 감지했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그가 대결하기로 한 선수는 캐나다와 체코의 AI 연구진이 개발한 포커용 AI 프로그램 ‘딥 스택’이었다. 그는 “처음엔 방송용 캠코더로 나와 대결할 선수(대역)를 보여주며 안심시킨 뒤 게임이 시작됐다. 첫 번째 대결에선 ‘이게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플레이가 허술했지만 두 번째 대결은 내 수를 읽으며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기기 어려운 상황을 연출해 힘겹게 승리했다. 그 뒤에 상대방이 AI임을 알았다. 이겼으니 망정이지 졌다면 회사와 엄청 싸웠을 거다(웃음).” 그가 AI를 이긴 비결은 마인드 컨트롤. 포커는 두뇌로 상대의 패를 예상하며 진행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며 내공이 쌓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 AI와 대결한 소감이 궁금했다. “천천히 나를 파악하고 두 번째에 들어서 내 게임 스타일을 파악해 공격하는 학습력에 놀랐다. 만약 열 판을 넘게 대결했다면 절대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을 거다”라고 진중하게 AI의 위력을 인정했다.
이렇듯 그는 키보드 대신 카드로 게임을 하는 포커플레이어다. 영광의 시간을 거두고 제2의 직업을 갖게 된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프로게이머로 15년 정도 활동하면서 선수로서의 열정이 식지 않은 상태에서 코치와 감독을 맡게 됐다. 내가 잘하는 건 자신을 발전시키며 게임을 운영하는 건데 후배들을 나처럼 만드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때마침 친분이 있던 현재 소속된 회사의 대표가 포커플레이어에 대한 비전을 들려줬다. 무엇보다 평생 직업으로 할 수 있는 매력에 끌렸다”라면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물론 임요환만의 ‘빅픽처’는 따로 있었다. “포커를 시작할 때 ‘게임으로 돈을 벌어? 게임 중독자 아니야?’라는 반응을 느꼈다. 국내에선 직업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분야지만 난 <스타크래프트>를 통해 그걸 완화한 이력이 있다. 하루빨리 이 직업을 대세 문화로 만들고 싶다”라고 마인드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피력했다.
성공을 좇되, 불행을 참고하지 말라
임요환은 34세에 긴 시간 몸담은 프로게이머 산업에서 은퇴했다. 마침내 그는 프로 포커플레이어가된 지 5년 만에 각종 세계 포커 대회에서 네 번의 우승과 한 번의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는 “직업을 바꾸고 나서 단 한 번도 실패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았다. 프로게이머로 정점을 찍을 때 느낀 게 있다. 물론 개인 차가 있을 수 있지만 무언가 결정했다면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려도 성공하지 못하는 게 삶이더라. 그런데 나쁜 사례를 참고하며 사서 걱정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안 된다. 나는 과거 동료 프로게이머였던 베르트랑이 나보다 먼저 포커플레이어가 되어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긍정적인 자극을 받았다”라면서 도전에 앞서 항시 잘할 수 있다는 정신 상태를 유지하며 재능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당신에겐 무엇인가요?
임요환이 포커플레이어로 전향해 받은 누적 상금은 약 2억 원.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상금은 모두 경비로 충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마인드 스포츠 산업이 국내에 도입되길 바라고 있다. “숙박료 부터 항공권, 모든 경비를 사비로 쓰며 경기에 참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2억 원을 벌었지만 매달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 이상 해외에 체류하고 있어서 사실 남은 게 없다. 하하하. 해외에 나갈 때마다 이산업으로 인해 주변 상권과 관광업이 눈부시게 발전한 것을 보며 안타까울 때가 많다. 국내 역시 유수한 포커 대회를 유치한다면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30대 후반에 인생의 2막을 연 그에겐 직업을 고르는 남다른 안목이 있을 터.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된 ‘퇴준생’(직장인으로서 퇴사를 꿈꾸거나 직업을 전향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그중에서도 임요환처럼 가정을 꾸린 가장이라면 그 고민은 깊어진다. 마침 창업과 이직을 빗대어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인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에 대한 그의 고찰을 들어봤다. 그는 “정답은 아니지만 잘하는 걸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깨닫고 그 일을 하고 있다면 완벽하게 터득하고 도전해 보길 권한다. 물론 좋아하는 일만 하면 당장은 행복할 수 있지만 뒤에 가선 절박해질 수 있다. 내 경우도 직업은 다르지만 결국 스포츠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이 모든 상황이 가족의 도움 없인 이룰 수 없었다는 임요환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고 있다. 나 역시 나만의 시간은 줄었지만 두 딸을 보살피며 가정이 화목해지는 걸 보면 보람을 느낀다. 솔직히 스스로가 자상한 편은 아니지만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다 보니 딱히 트집을 잡히지 않고 살고 있다(웃음). 사실 아내의 말을 듣고 손해 본 적은 없다, 이건 진심이다(웃음)”라면서 애정을 아끼지 않았다. 끝으로 그는 지면을 빌려 자신을 지지해준 팬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며, 그들이 있기에 자신이 존재하고 e스포츠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전언을 전했다. 자기 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 포커의 황제로 거듭나길 수많은 팬이 그를 응원할 거다.
글 유재기 사진 임익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