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의 고백 "그래봤자 나약한 인간…카메라 앞에서 정직하고 싶다"
"'국가부도의 날' 촬영을 마치고, 하루 정도를 잠만 자고 그간 받은 시나리오를 봤어요. 하필 제일 위에 이 책이 있었어요. 제목이 '내가 죽던 날'인데, 확 줌인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뭐지, 이거 해아하나."
운명을 느꼈다는 그녀의 예감은 맞았다. 김혜수는 시나리오를 쓴 신인감독의 전작이며 이력도 보지 않고 뛰어들었다. 12일 개봉하는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제작 오스카10스튜디오 스토리퐁)과 김혜수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죽던 날'은 유서를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져버린 한 소녀를 추적해가는 형사의 이야기다. 힘겨운 이혼 소송으로 무너져가다 일에 매달리게 된 형사 현수를 김혜수가 연기했다. 여러 작품에서 다채로운 캐릭터를 연기해 온 김혜수지만, '내가 죽던 날'에선 또 다른 그녀를 본 기분이다.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톱스타 이면의 무너져버릴 듯 위태로운 모습이다. 개봉을 앞두고 만난 김혜수는 마치 영화 속 현수처럼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나온 사람 같았다.
김혜수는 "배우가 사적 경험을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없다"면서도 "심적으로 아플 때 이 영화가 위로가 됐다"고 지난 시간을 돌이켰다. 그는 지난해 7월 모친이 13억 대 거액을 빌려 갚지 않아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알려진 이후, 계속된 금전 사고로 이미 8년 전 모친과 인연을 끊었다는 아픈 가정사를 밝힌 바 있다. 설마 했던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론에서 개인사가 알려진 건 작년이지만 제가 처음 알게 된 건 2012년이었어요. 일을 할 정신이 아니었고, 너무 몰랐고, 처음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고. 현수도 그러잖아요. 내 인생이 멀쩡한 줄 알다가 이럴 줄 몰랐다. 그게 제가 정말 했던 이야기예요. 그 대사 할 때 보면 얼굴에 소름이 돋아 있어요.
일을 할 상태가 아니기도 했지만, 심정적으로도 일을 하고 싶지 않았죠. 내가 괜히 연예인이 돼서 가정파탄이 됐나 말도 있었고. 모든 문제가 이 일을 해서 시작됐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때 저에게 파트너가 있었죠. 한 3년만 죽었다 생각화고 저를 믿고 가자고. 저는 정말 소름이 끼쳤어요. 배우로 살아온 시간을 이렇게 더럽히면서 마감하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죠. 그때 '직장의 신'을 하고, '관상'을 했어요. 일을 하는 동안에는 잊을 수가 있더라고요."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살려 직접 쓴 대사도 있다. 예전엔 캐릭터보다 김혜수가 먼저 보인다는 이야기를 듣곤 해,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연기하곤 했다는 김혜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그는 "이 인물을 구현하려면 내가 나의 어두운 면, 상처나 고통을 감추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됐다"면서 극중 나오는 악몽은 실제로 1년 이상 꿨던 자신의 꿈 내용이라고 말했다. 이어 "꿈 속에서 제가 죽어있는데, 좀 시간도 된 것 같은데 누가 좀 치워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매번 자다 깨다 했다"면서 "그러면서 저도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심리적으로 죽은 상태인가 보다"고 털어놨다.
늘 당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 김혜수가 내놓은 의외의 고백들. 김혜수는 괜찮겠느냐고 염려하는 기자를 향해 "저는 나약하다. 나약하고 쪼잔하지만 강인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라며 으쓱하는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되려 "매니저에게 늘 '고생했다, 여기까지 하고 은퇴하자' 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한 술을 더 떴다. 스스로를 좋아하지만 연기를 할 때마다 스스로 한계를 직면한다는 고백이었다.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한 뒤 30년 넘는 시간을 배우로 살아오고 있건만, 김혜수는 연기를 계속하는 원동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반성을 거듭하고 있다고 했다. 전도연 송강호의 2007년 영화 '밀양'을 2017년 TV로 우연히 다시 보다 갑자기 은퇴해야겠다 결심한 적도 있었단다.
"거기 나오는 배우들이 너무 위대하게 느껴졌어요. '연기는 저런 분들이 하셔야지' 속으로 그러면서 밖에서 찬바람을 쐤어요. 그 전에는 괴로웠어요. '나는 왜 2% 20% 부족했나'. 그런데 그때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생각이 들고 너무나 심플하게 마음이 정리됐어요. 이창동 감독과 전도연 송강호 배우에게 문자를 하고 싶은데 새벽 3시였어요. 조용히 작품을 거절하면 자연스럽게 은퇴잖아요. '자, 여기까지' 하고 각오를 했는데… 우리 대표가 '국가부도의 날'을 가져왔어요. 피가 거꾸로 돌더라고요.(웃음)
솔직히, 연기자로서 모든 인생을 심플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처음이었어요.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너무 확실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너무 치사하게 '요것까지만 해야지' '요것까지만 해야지'하다가, 이 작품을 만났어요.."
'내가 죽은 날'을 본 관객들은 어떤 김혜수를 볼까. 별다른 사건도, 커다란 갈등도 없이 끈질기게 사건을 추적해가면서 진실에 거듭해가는 형사. 지금껏 그녀를 대표해왔던 강렬한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어딘지 밋밋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을 관객을 안내하고 마주하며 다시 돌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김혜수의 존재는 비할 데 없이 묵직하다. 텅 빈 눈동자로 시작해 빛나는 충만함으로 극을 마무리하는 영화 속 현수가 곧 김혜수처럼 보인다. 작품의 흥행과 상관없이 이 영화는 곧 김혜수의 대표작이 되지 않을까. 그는 "대표작은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다. 있으면 어떨까 생각은 한다"고 했다.
"오래 해온 생각인데, 캐릭터를 매개로 내가 카메라 앞에서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에요. 얼마나 기술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연기를 잘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영화는 가장 군더더기 없이 캐릭터로만 드러날 수 있는, 내가 카메라 앞에서 정직할 수 있는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니가 너를 구해야지.' 시나리오 속 대사에 펑펑 눈물을 쏟았다는 김혜수. 그는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것이 단 하나도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강조했다. 작품을 통해 만난 인연도 하나하나 소중하단다.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만난 배우 이정은, 김선영 두 배우와 만남이 특히 그랬다면서 김혜수는 환히 웃었다.
"저는 연기 잘 하는 사람은 다 어른 같아요. 이정은은 배우로서 저에게 신기루 같은 분이에요. 카메라 앞에서 얼마나 정직해질 수 있나, 그건 작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된 것이 감사하고 소중해요. 김선영이란 배우를 만난 것도 못지 않지요. 인격과 배우로서 성장이 정비례하는 분들을 한 작품 하면서 둘씩이나. 예상도 못한 인연을 얻었어요. 그것만으로도 소중합니다….
우여곡절이 있지만 그럼에도 늘 좋은 사람을 늘 발견하게 돼요. 제가 강인한 여성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봤자 나약한 인간이죠. 그런 사람들 보면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요. 서로 의지가 되고 격려가 돼요. 제가 늘 혼자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