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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도 '전세사기' 있었다"… 우리가 몰랐던 ‘전세’의 기원

세계일보

“17∼18세기 조선에서도 현재와 같이 전세 사기 및 보증금 손실 위험이 있었다.(중략) 이는 전세 보증금 손실에 관한 위험이 과거와 현재에 걸쳐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주택금융공사(HF) 산하 주택금융연구원의 최영상(43) 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전세의 원형, 조선 후기 세매(貰賣·세를 받고 팔다) 관습의 특성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전세 제도가 사실 300여년 전 조선 후기에도 존재했으며, 지금 우리가 겪는 문제들 역시 수백년간 잠재해 온 일종의 ‘그레이 스완’(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지만 해결이 어려운 악재)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부동산학 박사인 최 연구위원은 지난 25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세 제도는 일반적인 부동산 담보 대출과는 다른 것으로, 주택의 사용권을 매개로 한 사적 대출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라며 “(해당 연구는) 왜 우리나라에만 전세 제도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악덕 임대인 횡포’ 겪은 조선 후기 무관 노상추

최 연구위원은 아직 기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전세 제도가 조선 후기 ‘세매 관습’에서 유래됐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세매와 현재의 전세 제도가 공유하는 채권·금융적 속성을 분석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세매는 집주인이 현재의 전세 보증금과 유사한 ‘세전’(貰錢)을 받고 본인 소유 집에서 임차인이 살 수 있도록 하되, 세전을 돌려주면 다시 집을 찾을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조선 후기 악덕 임대인의 횡포로 전세 보증금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날 뻔한 사례로는 무관 노상추(盧尙樞)의 경험담을 들었다. 노상추는 1763년부터 1829년까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노상추 일기’를 남겼는데, 여기에 그가 겪은 억울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한다.

정조 20년(1796년) 노상추는 한성(한양) 주동(鑄洞)에 셋집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집주인이 일방적으로 퇴거 요청을 했고, 노상추는 세전을 온전히 돌려받지 못할 상황까지 처하게 된다.


“집주인 허許 생生이 내가 살고 있는 사랑을 승지 허질許咥이란 사람에게 40금金을 받고, 다시 물려서 나를 쫓아 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내가 내는 본래 세는 27관貫인데 13금金을 더 사용하려고 염치를 돌아보지 않으니…”


“허許가 말하기를, ‘돈을 이미 다 써서 10냥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 수량을 가지고 가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사람을 대하는 일을 아이들 놀이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허許가 사과하였다. 오늘 또 사당 안의 청사를 다른 이에게 팔아서 30냥을 내주었다.” (국역 노상추 일기 4-6(한국사료총서 번역서 14-16)·‘전세의 원형, 조선 후기 세매 관습의 특성에 관한 연구’ 인용)

노상추는 집주인이 다른 방을 정언인(鄭彦仁)이라는 인물에게 임대하면서 받은 돈으로 결국 보증금을 돌려받긴 했는데, 이를 두고 “정언인도 사기를 당한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보증금을 이미 다 써버린 집주인이 후속 임차인에게 받은 보증금을 선순위 임차인에게 돌려주는 식의 ‘돌려막기’ 행태가 조선 후기에도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 연구위원은 “노상추 일기에서 발견되듯이 이런 (전세) 사기는 사실 옛날부터 계속 존재해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집중’ 현상에 ‘가문본가’ 중시 등 겹치며 세매 나타나

최 연구위원은 세매 관습이 나타난 여러 배경 중 하나로 당시 양반들의 ‘가문본가(家門本家) 중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짚었다. 왕실로부터 토지를 하사받아 한성에 집을 지은 사대부들의 후손이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아예 집을 팔아버리기보단 그나마 집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는 세매를 택하면서 세매 관습이 형성·발전돼 왔다는 해석이다. 가문의 명예를 상징하는 집을 쉽사리 팔아버릴 수 없는 당시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긴 셈이다.



세계일보

한국주택금융공사(HF) 산하 주택금융연구원의 최영상(43) 연구위원이 지난 25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 후기 세매(貰賣) 관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 연구위원은 세매와 현재의 전세 제도가 공유하는 속성을 분석한 ‘전세의 원형, 조선 후기 세매 관습의 특성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또 다른 주요 원인으로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한 ‘서울 집중’ 현상이 꼽힌다. 조선의 ‘과거 제도’가 당시 귀족 계층으로 볼 수 있는 양반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데 일조했고, 이들이 살 집이 부족하자 세매가 나타나게 됐다는 것이다. 최 연구위원은 “한양에 인구가 몰리는 것은 조선 중기부터 문제가 됐었다”며 “수도권 집중이 시작되면서 집이 부족해지자 양반 중에 옛날부터 (한양에) 살던 양반들이 집을 빌려줘야 새로운 양반들이 살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영조 18년(1742년)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의 국구(國舅·장인)인 광성부원군의 자손들이 궁핍해지자 본가를 세매하고 낙향한 것과 관련해 영조와 신하들이 논의한 내용이 포함되기도 했다. 광성부원군의 자손들을 측은히 여긴 영조는 400냥을 지원해 본가를 찾도록 도와줬다. 정조 22년(1798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다.


최 연구위원은 “해당 사례들에서 (광성부원군 자손 등이) 세매의 계약 기간을 특정하지 않은 형태로 세매를 계약하고 고향으로 낙향한 것으로 볼 때, 세매의 계약 기간이 장기적 혹은 영구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세전을 반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집을 되찾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세대에 걸친 장기적 문제일 수 있다는 추정이다.

◆“과거가 임대인-임차인 간 정보 더 대칭적”

현 전세 제도가 오히려 조선 후기 때보다 임대인-임차인 간 정보 비대칭성이 커졌다는 주장도 이 연구에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다. 조선시대 한성 주택시장에서 대다수의 임차 수요는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들로부터 비롯됐을 텐데, 당시 양반끼리는 서로 족보·가문을 확인하는 게 일종의 관례였던 만큼 지금보다는 임대인-임차인 간 정보가 더 대칭적이었을 것이란 분석이다.


최 연구위원은 “외국인들에게 전세 제도를 설명하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뭘 믿고 집주인한테 그 큰돈을 빌려주느냐’는 것”이라며 “(조선시대에는 족보 확인을 통해) ‘이 사람이 내 돈을 떼먹지 않을 것’이라는 신용이 사실상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 전세 보증금 미반환 문제를 두고 강력한 처벌이 있었다는 점도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영조 시기 승정원일기에는 노비가 상전세가(上典貰價·노비가 상전인 양반에게 받은 세매 보증금)를 돌려주지 않아 감옥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다는 사례 등이 포함돼 있다.

◆“전세, 단기간 소멸은 불가능…‘보증부 월세’로 변해갈 것”

그렇다면 앞으로 전세 제도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유지되고, 어떻게 변할까. 최 연구위원은 “전세 보증금을 후속 임차인한테 전가한 집주인들이 있기 때문에 전세가 단기간에 소멸하기는 사실 불가능하다”고 짚었다. 다만 지난해 시장에서 전세 사기·역전세 문제 등을 이미 겪었고, 앞으로도 또 전셋값이 급변하는 상황이 오면 전세 제도에 대한 리스크를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만큼 점차 ‘보증부 월세’ 식으로 변해갈 것으로 내다봤다. 최 연구위원은 “점점 보증부 월세가 늘어날 확률이 높은데 이 기간이 사실 상당히 오래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세 제도의 근본적인 한계점은 현대에 들어 더 복잡다단해진 제도 속 임차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개입 및 정책적 보완 필요성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최 연구위원은 과거와 같이 임대인-임차인 간 정보가 보다 대칭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과 국가가 제공하는 전세 주택 공급 확대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최 연구위원은 “조선 시대의 세매 보증금 손실 위험 사례는 지금의 전세시장에 있어 매매-전세 가격의 변동성과 보증금 손실 위험 전반을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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