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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복수하러 한국 왔다… ‘철의 삼각지’ 피로 물들이다

미 국방부, 6·25 참전 명예훈장 수훈자 로널드 로서 소개

세계일보

6·25 전쟁 당시 혼자서 중공군을 20명 가까이 사살하는 등 큰 공을 세운 로널드 로서(오른쪽·당시 육군 상병)가 1952년 6월 27일 백악관에서 해리 트루먼 대통령한테 명예훈장을 받는 모습. 미 국방부 홈페이지

미군의 일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동생이 전사하자 복수를 결심한 20대 미국인 청년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 점령 임무에 투입돼 이미 3년간 군복무를 하고 전역했으나 복수를 위해 다시 육군 군복을 입었다. 그리고 치열했던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평강·철원·김화) 전투에서 혼자 적군을 20명 가까이 사살하는 공로를 세웠다.


미국에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의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은 로널드 로서(1929∼2020)의 이야기다. 훈장을 받을 당시 계급이 상병이었던 그는 중사를 끝으로 전역했고 올해 8월 9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애국자로 살았다.

동생의 복수를 다짐하며 한국으로 떠나다

9일 미 국방부가 6·25 전쟁 70주기를 기념해 홈페이지에 소개한 로서 중사는 무려 17남매를 둔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들을 불량배 등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식구가 많아 집안이 어려웠던 탓에 로스는 1946년 17세의 나이로 일찌감치 육군에 입대했다. 한 해 전에 2차 대전이 끝나 전투는 겪지 않았고 패전국 일본과 독일을 점령하는 임무에 투입됐다. 1949년까지 3년간 복무한 뒤에는 제대해 아버지 뒤를 이어 광산에서 광부로 일했다.


멀리 한국에서 일어난 6·25 전쟁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미 육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동생 리처드가 그만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복수를 원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다시는 내 동생을 죽일 수 없게 만들겠노라고.”


로서가 미 육군 제2사단 제38보병연대 소속으로 중공군과 싸우던 1952년 1월 12일 마침내 그에게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미군은 6·25 전쟁 최대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에서 중공군과 그야말로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날 로서가 속한 중대에 ‘중공군이 점령 중인 산꼭대기 한 곳을 탈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로서 등 170명의 장병이 해당 고지에 대한 기습을 시도했으나 곧 적에게 발각됐고 되레 대포와 박격포, 기관총 세례를 받아 전진이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로서는 수중에 M2 카빈 소총 1정과 슈류탄 1개밖에 없었다. 그래도 동료 병사들과 함께 용감하게 돌격해 중공군이 버티고 있는 진지 앞까지 쳐들어갔다. 소총이 불을 내뿜고 수류탄도 제대로 터졌다. 곧 여기저기 중공군 시체가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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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참전용사인 로널드 로서 예비역 육군 중사(오른쪽)가 83세가 된 2012년 까마득한 후배 장병들과 만나 악수하는 모습. 미 국방부 홈페이지

20명 가까운 중공군 사살… 원수를 갚았다

숫적으로 우세인 중공군의 반격은 만만찮았다. 훗날 로서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아군 한 명씩 전사하거나 부상했다”며 “참으로 견디기 힘든 전투였다”고 회상했다.


탄약과 수류탄이 다 떨어진 로서는 이를 보충하려고 일단 본대에 귀환했다. 그 길에 총에 맞아 쓰러져 있던 중위 한 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재보급을 마치고 돌격했지만 적의 저항은 철통 같았다. 마침내 3번째 돌격 끝에 겨우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중대원 170명 중 90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실종돼 겨우 68명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끔찍한 전투였다.


로서는 그 뒤에도 최전방에 남겠다고 했다. 하지만 군 당국은 “당신은 명예훈장 수훈 대상으로 선정됐다”며 귀국 조치를 서둘렀다. 1952년 6월 27일 로서는 백악관에 들어가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훈장을 목에 걸었다. 훈장 공로를 적은 공식 문서에는 로서가 중공군 13명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그는 훗날 웃으며 “내가 죽인 중공군은 20명도 훨씬 더 될 것”이라고 했다 한다.


6·25 전쟁이 끝난 뒤에도 로서는 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고 계급은 중사까지 올랐다. 로서가 육군을 떠난 건 베트남전쟁 기간 중이었다. 가장 어린 남동생 게리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자 이번에도 ‘복수’를 다짐하며 자신을 베트남에 보내달라고 간청했으나 미 육군에 의해 거부당한 뒤였다. 이후 그는 전쟁에서 잃은 두 동생 리처드·게리의 이름을 딴 장학 프로그램을 만들고 후진 양성에 애쓰며 남은 생을 보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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