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선포 155분… 한밤중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 [밀착취재]
“이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한밤중이었지만 바로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4일 오전 2시. 계엄령 해제 한 시간 뒤,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만난 김찬우·김래명(18)군은 영하권의 추위에 흰 입김을 내뿜으면서도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기 남양주시 와부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두 학생은 사상 초유의 ‘계엄령 비상 선포’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한 시간 거리의 국회로 향했다.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 시위 현장에서 만난 김찬우(왼쪽)·김래명군. 이예림 기자 |
국회 앞으로 달려온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10대부터 60대까지,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도시의 밤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과 분노, 그리고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이날 밤, 국회 앞은 잠들 수 없었다.
◆한순간에 뒤바뀐 서울의 밤
전날인 3일 오후 10시25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서울의 평화로운 겨울밤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한 시간 뒤,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모든 정치활동과 집회를 금지하는 계엄사령부 포고령을 발표했다. 도시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최고조에 달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모든 국회의원은 즉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며 긴급 소집을 알렸다. 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회의 표결이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의원들은 본회의장으로 향했고,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도 하나둘 국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인근 지하철역과 도로는 금방 시민들로 북적였다. 영하의 날씨에 눈발이 흩날렸지만, 국회와 가장 가까운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앞은 카메라를 든 유튜버들과 시민들로 가득 찼다. 신호등 앞 인도는 이미 수백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3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군 버스를 막아선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예림 기자 |
오후 11시30분, ‘대테러 초동조치 출동차량’, ‘대한민국 육군 버스’라는 글씨가 선명한 대형 버스가 등장하자 시민들이 이를 막아서며 소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나둘 버스 주위로 몰려 든 시민들이 “군인들을 막읍시다”라고 외쳤다. 공중에서는 헬기 3대가 굉음을 내며 국회 주변을 선회해 현장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자정이 넘자 어느새 인파는 6번 출구 앞 신호등 건널 목을 완전히 메웠다. 영하권의 추위 속에서도 시민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 자리를 지켰다. 태블릿 기기에 ‘윤석열은 퇴진하라’를 적은 젊은이, 태극기를 든 시민, 외신 취재진까지 현장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국회 정문 돌담 위로 젊은 남성 넷이 올라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계엄!”이라는 선창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철폐!”를 함께 외쳤다. ‘애국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4일 오전 1시5분. 본회의에 참석한 의원 190명 전원이 계엄령 해제에 찬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국회 앞은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시민들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환호했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여기저기서 “이겼다!”, “해냈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4일 오전 12시30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시민들이 “계엄 철폐”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예림 기자 |
누군가 외친 “와!” 소리에 맞춰 시민들이 순서대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내리는 파도타기가 시작됐다. 한쪽에선 부부젤라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다른 쪽에선 앞뒤로 뛰며 기쁨을 만끽하는 이들도 있었다. 월드컵 응원전을 연상케 했다.
한 여성 시민은 확성기를 들고 “후속 논의가 진행 중이니,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계속 구호를 외치자”고 제안했다. 시민들은 “탄핵”으로 바뀐 구호를 외치며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한밤중에 달려온 시민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 김예덕(25)씨는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비트코인이 급락하길래 뭔 일인가 했다. 뉴스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길래 바로 나왔다“며 “처음에는 군인들도 있고 무서웠지만, 계엄령이 해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고 말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 김예덕(25)씨. 이예림 기자 |
김씨는 “윤 대통령이 국회를 범죄자 소굴이라고 표현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며 “결국 본인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권한을 함부로 휘두른 거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홍대에서 야근하던 박지은(30)씨는 직장 동료 두 명과 함께 막차를 타고 국회로 향했다. “유튜브로 군인들이 국회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는 길에 친구 아버지가 전화로 ‘조심하라’고 하시는 걸 보고 이게 정말 심각하구나 싶었다”고 했다.
송파구에서 온 정충규(60)씨는 TV로 계엄령 선포를 보고 아내와 즉시 지하철을 타고 왔다. 정씨는 “아주 어렸을 때도 계엄령이 있었는데, 그때는 밤 늦게 돌아다니면 안 되고 정말 삼엄했다”며 “그때와 비교하면 이건 완전 쇼, 완전 코미디다”라고 말했다. 옆에 선 아내 황모(59)씨는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 창피하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