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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SBS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프렌치 수프"

[씨네멘터리]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12

SBS

'맛집'과 '먹방', '간편식'이 유사 이래 가장 각광받고 있는 요즘 -그에 반비례해 요리로부터 인간이 점점 소외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요리의 본질, 문명의 본질, 사랑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웅숭깊고도 아름다운 미식(美食)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이 영화의 제목은 미식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프랑스를 직접 떠올리게 하는 "프렌치 수프". 프랑스어 원제는 "도댕 부팡의 열정"이고 미국 등 영어권에서는 "테이스트 오브 띵스"(Taste of Things)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원제와 영어 제목, 한국어 제목이 다 다른 흔치 않은 경우인데 세 제목 모두 그런대로 어울린다. 이 영화가 그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풍부한 맛(flavor)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댕 부팡의 열정"(La Passion De Dodin Bouffant)은 트란 안 홍 감독이 마르셀 루프의 1924년 소설 "미식가 도댕 부팡의 삶과 열정"을 프리퀄격의 영화로 각색하면서 나온 제목이다. 마르셀 루프는 식도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 캐릭터인 도댕 부팡을 창조하면서 프랑스의 저명한 미식(저술)가인 브리야 사바랭을 참고했다고 알려져있는데, 브리야 사브랭이 남긴 유명한 말이 바로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알려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이다.

#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프렌치 수프"의 첫 장면은 영화 "리틀포레스트"(2018)와 비슷하다. 서울을 떠나 고향집에 돌아온 혜원(김태리)은 어두운 밤, 눈밭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는 배추를 잘라와 배추된장국을 끊여먹고는 비로소 살아있다는듯한 표정이 된다.


"프렌치 수프"에서는 타이틀이 페이드아웃되면 베테랑 요리사 외제니(줄리엣 비노쉬)가 푸르스름한 신새벽에 밭에 나가 양상추를 자르고 당근 등을 캐서 돌아온 뒤 요리를 시작한다. 그녀는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도댕 부팡(브누와 마지멜)의 저택에서 그와 함께 사는 20년 동반자다. (왜 요리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동반자라고 했는지는 후술)


도댕 부팡은 임용고시를 통과하지 못하고 알바를 뛰다 고향집으로 돌아온 김태리는 물론, 자영업자인 '고독한 미식가'와도 비교가 안될 정도의 부자다. 방이 몇개인지 가늠도 안되는 아름다운 저택과 부엌을 가졌다. 때는 '벨 에포크'라 불렸던 19세기 후반 프랑스. 영화가 정확히 설명하지 않지만 도댕 푸팡은 오로지 미식만을 생각하면 살아도 되는 부르주아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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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니(왼쪽)와 도댕 부팡 / 그린나래미디어

도댕 부팡이 먹는 것이 도댕 부팡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막 밭에서 캐온 신선한 채소와 배를 가르고 꺼내놓은 내장 상태로 보아 물이 좋아뵈는 생선, 실로 꿰매 각을 잡아놓은 선홍빛 송아지 갈비가 다채로운 조리 도구와 요리사 외제니의 섬세한 손길 속에 오븐과 커다란 냄비 속에서 익어간다.


도댕과 그의 지인들은 2층 식탁에서 마음껏 식도락을 즐긴다. 코스의 마지막 요리는 '오믈레트 노르베지엔'이라 불리는 디저트인데 케이크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고 겉은 머랭을 덮어 살짝 구운 '외온내냉'(外溫內冷)의 이 디저트는 케이크를 즐기지 않는 나도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다.


장장 30여 분에 이르는 오프닝 씬은 '지루할 법한데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은' 요리·먹방 씬으로 거의 채워졌다. 카메라 십여 대를 동시에 돌린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는 반대로 달랑 한 대의 카메라로 찍었는데, 그 한 대가 물 흐르듯 춤을 추듯 배우들과 요리 사이를 유영(遊泳)하며("파이낸셜타임즈"는 'flow'라는 표현을, "로저에버트닷컴"은 'glide'와 'float'란 표현을 썼다) 좀처럼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편집점이 많은 데도 편집점을 잊게 하는 유려한 카메라 워킹과 편집은 '귀에서' 침이 흐르게 하는 효과음과 함께 (요리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는) 향을 느낄 수 없는 영화의 단점을 상쇄한다.

# "결혼은 디저트부터 시작하는 만찬이다"

부자인 도댕 부팡도 제맘대로 못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요리사이자 동반자인 외제니와 결혼하는 일이다. 수차례 청혼을 했지만 그때마다 외제니는 거절했다. 도댕이 외제니의 방문을 두드리는 방식으로 종종 동침하는 두 사람이지만 외제니는 도댕에게 "이미 부부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요리를 연구하고 맛보고 있지 않냐"며 "결혼해도 문을 안 열어줄 권리가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도댕은 "결혼은 디저트부터 시작하는 만찬"이라고 겸연쩍게 농담을 던진다. 외제니도 도댕을 좋아하지만 '엮이고' 싶지는 않은 걸까? 나이 사십을 넘으면 좋은 인간 관계라도 일정 수준 이상은 엮이고 싶지 않아서 조심하는 게 생긴다. 지음(知音)이라도, 아니 지음이라서, 돈으로 엮이거나 이해 관계로 엮이고 싶지는 않다.


트란 안 홍 감독은 지난해 칸에서 감독상을 받고 난 뒤 인터뷰에서 "외제니는 오랜 전부터 도댕과 사랑에 빠졌지만 동시에 이 사랑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사랑 앞에서 저항하기 때문에 지금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씨네21" 2023년 6월)

#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해"

도댕과 외제니 두 사람에게는 최근 공통의 관심사가 하나 더 생겼다. 하녀의 친척인 폴린이라는 소녀다. 폴린은 소스의 맛만 보고도 거기에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아맞추는 요리 천재(가 될 소질이 있)다. 두 사람은 폴린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외제니에 비하면 도댕은 폴린에 대해 살짝 의구심을 품는 쪽이기는 하다. "마흔 전에는 미식가가 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폴린과 함께 프랑스 전통 요리를 만드는 도댕은 폴린에게 소의 골수(骨髓)를 맛보게 한다. 폴린이 별로라는듯한 표정을 짓자 도댕은 말한다.


"그럴 수 있어. 넌 어리니까. 골수는 복잡한 음식이야.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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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린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도댕 / 그린나래미디어

가끔씩 생각나는 맛이 있다. 초등학생 때,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던 어느 날 오후 어머니가 최소한의 재료로 후다닥 겨우 만들어내 숨죽이며 먹던 수제비가 이따금씩 떠오른다. 신문지를 깔고 참기름을 바른 뒤 굵은 소금을 뿌려 연탄불에 구워 먹던 김 생각에 입맛을 다실 때도 있다. 이 김은 정확한 직사각형도 아니고 완벽하게 평평하지도 않았다. 추운 겨울, '스댕' 대접 하나를 들고 나가 마당에 묻어놓은 독 뚜껑을 열어서 퍼온 얼음 둥둥 뜬 동치미의 맛이 그리울 때도 있다.


어머니가 요리를 그만두신지 한참 지났다. 더 이상 요리를 하지 않으시고, 하실 수도 없다. 이 세상에서 내게 그 맛들은 이제 끝났다. 아무리 맛집에 가본들 그때 그 맛이 나지는 않는다. 맛은 기억이고 추억이기 때문이다.

# "행복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것"

어떤 모임에서 그저 그런 와인을 마시고 있는 이에게 친구가 값비싼 와인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이게 더 좋은 와인이거든. 한번 맛이나 보게나." 자신이 늘 마시던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있던 이가 답했다. "이보게, 나는 이 와인이면 족하네. 이보다 더 맛있는 와인이 있다는 걸 굳이 알고 싶지 않아."


맞다! 어쩌면 행복은 내가 지금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힘이다. 이따금 값비싼 요리를 맛볼 때면 걱정될 때가 있다. 나의 간사한 입맛이 소박하고 단순한 맛을 잃어버릴까봐. 시각과 청각, 미각같은 감각은 일단 한번 눈이 높아지면 되돌리기가 어렵다.


컴퓨터 모니터만한 브라운관TV 시절에는 그걸로도 충분하고 만족했지만, 40인치가 넘는 16:9 비율의 SDTV가 나오자 신세계가 열렸다. 이윽고 50인치 이상의 HDTV가 나오니 반쯤은 극장에 온 것 같았는데, 이제는… 100인치 UHDTV나 프로젝터가 있으면 정말 극장에 안 가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프렌치 수프"는 사랑 또는 존중이라는 이름의 인간 관계가 결혼이라는 제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묻는 영화이기도 하다. 비단 사랑이라는 감정뿐 아니라 인간 관계가 제도 속으로 들어가면 안정과 불안정함이 동시에 생겨난다.


도댕은 "행복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것"이라는 성 오귀스탱의 말을 인용하면서 외제니에게 묻는다. "내가 당신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어떤 답변이 나올지,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을 감독은 마지막 씬에 두었다. 대답이 끝나는 순간 마스네의 타이스 명상곡이 흐른다. 이 영화에서 지지고 볶는 효과음 외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음악이다.

* * *

사실 이 영화에는 제목이 하나 더 있었다.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 썼던 '포토푀'(Pot-au-Feu)라는 제목이다. 포토푀는 도댕이 폴린과 함께 만들던 프랑스 전통 스튜로 소고기의 다양한 부위와 각종 채소를 넣고 오랜 시간 약불에 뭉근하게 끓인 프랑스 대표 요리다. 영혼의 음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된장찌개쯤 되려나.


이 영화를 수입한 그린나래미디어측은 "영화 속에 포토푀 뿐만 아니라 콩소메 등 다양한 수프가 나와서 그것을 포괄하는 제목인 동시에, 여러가지 재료를 넣어 오래 끓인 수프가 주는 따뜻함, 그리고 그것이 도댕과 외제니의 관계나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여러 고민 끝에 결정"했다고 밝혔다.


식욕이 색욕이나 수면욕 등과 함께 묶이는 차원을 떠나서 인간과 '요리'는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프렌치 수프"가 보여주는 인간성은 재료를 재배하고 정성을 다해 창의적으로 요리하고 나누어 맛봄으로써 완성된다.


그런데 새벽 배송이 일상화된 요즘은 시장에 나가 신선한 채소나 고기를 사오는 최소한의 노동조차 제거되기 일쑤고, 요리하는 -귀찮고도 즐거운- 과정조차 밀키트로 상당 부분 때울 때가 많다.


새벽 배송이 시작된 후 나의 소중한 한끼가 왠지 전에 비해 맛이 없어진 것 같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식사에서 노동이 배제됐기 때문이다. 음식조차 공산품화되면서 사람이 먹거리에서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쿠팡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위계에 의한 고객 유인 행위'에 대한 시정 명령과 과징금이 부당하다면서 로켓 배송을 축소하거나 못할 수도 있다고 하니 쿠팡은 로켓배송을 접어도 좋을 것이다. 당분간 팍팍한 일상이 좀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겠지만 길게 보면 그 편이 환경이나 에너지 절약,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나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적응하게 마련이니 어떻게든 길이 있을 것이다. 새벽 배송 없을 때도 다 먹고 살았다.


"리틀포레스트"에서 김태리가 요리 잘하는 엄마와 함께 살던 고향집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는 이랬다.


"인스턴트 음식은 나의 허기를 채우기엔 부족했다. 배가 고파 돌아왔다는 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외식을 하러 나가서까지 왜 굳이 '집밥, 집밥'하는지, "프렌치 수프"는 그 이유를 깨닫게 해준다.


이주형 논설위원 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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