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쾌거 뒤엔 CJ 자본의 힘이…
수백억 드는 오스카 캠페인 이끈 CJ…이명세·김기덕은 잊힌 이유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인의 수상을 보게 되다니요. 감독상 받은 봉준호 감독이 유독 오스카한테만 자주 외면받아온 '모든 영화인의 선생님'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헌사를 바칠 땐 왈칵 눈물까지 쏟아지더군요. 경쟁자까지 따뜻하게 챙긴 격조 있는 수상소감에 괜히 저까지 우쭐해졌습니다. 거기다 작품상마저 가져가 버리니 초현실적이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작년 한국영화사 100주년에 개봉된 영화가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지에 우뚝 선 겁니다.
작품상 수상 무대에 오른 여러 <기생충> 관계자 가운데 단연 눈에 띈 인물이 있습니다. 한껏 부풀려 염색한 붉은 머리로 유창한 영어 수상소감을 쏟아내 이목을 끈 이는 CJ 이미경 부회장입니다. 일각에선 이 부회장이 무대에 오른 걸 비판하는데, 오히려 이 부회장이 연설하도록 주최 측에 조명을 밝히라고 요구한 건 톰 행크스와 샤를리즈 시어런 같은 오스카 수상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화 제작은 바른손이 했지만, <기생충>의 오스카 정복엔 투자와 배급을 맡은 CJ의 역할이 컸습니다. 봉 감독이 아니라 이 부회장이 무대 가운데 섰다는 자체가, 오스카 작품상 영예는 '제작자'에게 돌아간다는 주지의 사실을 다시금 증명했습니다.
스튜디오 명예 걸린 오스카 작품상…캠페인 예산만 수백억 원
할리우드엔 '오스카 시즌', '아카데미용 영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오스카 시즌을 겨냥해 아카데미용 영화를 만든다는 겁니다. 보통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를 노려 개봉하는 영화들이 이른바 오스카용 영화입니다. 여름을 겨냥한 블록버스터와 비교됩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오스카용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작품상 수상 여부가 곧 스튜디오와 제작자를 평가하는 바로미터기 때문입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 등으로 작품상 트로피만 3개를 수집한 사울 자엔츠는 평생을 거물 제작자로 불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오스카 시즌에 벌이는 영화 개봉과 홍보는 모두 수상을 위한 일종의 경주가 됩니다. 거물 호칭을 차지하는 영광을 위해, 또 겨울 시즌 흥행을 위해, 이 시기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벌이는 일련의 행위는 '캠페인'이라 불립니다. 미국 연예 전문매체 버라이어티가 작년 오스카 시즌에 한 보도에 따르면 이런 캠페인에 들어가는 예산이 많게는 3천만 달러에 이릅니다. 주로 투표권을 가진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 8천여 명을 홀리는 데 쓰는 돈입니다.
칸 수상 직후 캠페인 돌입한 CJ…"총수일가 의지 결정적"
CJ는 이런 미국 영화 산업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공략했습니다. 지난해 5월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때부터 곧바로 오스카 경주를 준비한 겁니다. 캠페인 전략을 짜고 예산을 집행하는 덴 CJ ENM 영화사업본부 해외 배급팀이 중심이 됐습니다. 숀 펜과 제이크 질렌할 같은 할리우드 스타를 고객으로 둔 현지 홍보 대행사와 캠페인 대행사를 선정했습니다. 미국을 공략하려면 현지 사정에 밝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업체들이 미국 여론 주도층을 대상으로 펼친 캠페인 규모가 엄청납니다. 아카데미 회원 대상 시사회는 물론, 회원 상당수가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감독‧작가‧배우조합 등 직능 단체를 대상으로 잇따라 시사회를 열었습니다. 시사회가 끝난 뒤 벌이는 각종 파티와 리셉션에 들어가는 비용도 상당하죠. 대중 상대로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저 유명한 NBC <투나잇쇼> 출연을 비롯해 각종 매체 노출도 성공했습니다. 북미 배급사 네온은 SNS 홍보를 통해 '제시카 징글'을 화제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기생충>을 역대 북미 외국어영화 흥행 6위에 올라서게 만든 원동력입니다.
CJ ENM 한 임원은 "작년 <로마>가 오스카 경주에 3천만 달러를 쓴 걸로 아는데, (로마는) 좀 많이 쓴 걸로 보인다"고 말해 CJ가 쓴 돈의 규모를 짐작게 했습니다. 참고로 <기생충> 제작비가 135억 원 정도로 알려졌으니, 영화 제작보다 오스카 캠페인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간 셈입니다. 아무래도 이 정도 규모의 돈을 쓰려면 총수 의지 없이는 어렵겠죠. 실제로 이미경 부회장은 작품상 수상소감 때 "불가능한 꿈을 꿈꿀 수 있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동생 이재현 회장에게 고맙다"고 밝혔습니다. 그 자신 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이 부회장은 직접 회원들을 접촉하며 수상을 위해 뛰기도 했다는 후문입니다.
영화예술이 '산업'임을 상기시킨 수상…이명세 · 김기덕의 경우
요컨대 기생충 쾌거는 한국 영화산업의 '글로벌화'를 위해 필요한 게 뭔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기생충이 아무리 잘 만든 영화일지라도 배급과 홍보의 힘이 없었다면 미국 시장에 안착하기 어려웠겠죠. 실제로 한국 영화계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할리우드 거장들을 매혹시킨 이명세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미국 예술 영화계를 흔든 김기덕 감독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에겐 지금 봉준호의 CJ처럼 거대한 자본과 네트워크가 없었을 뿐입니다.
늘 세계를 통합하는 단 하나의 플랫폼을 지향하는 미국 영화산업의 '영리함' 역시 기생충에겐 기회였습니다. 영화평론가 강한섭 서울예술대학 교수는 "101년 한국 영화사에 <기생충>만 한 영화가 없었던 게 아니다"며 "주류 백인 위주 가치를 전파해온 미국 영화계가 다양성을 받아들여 확장하는 경향의 수혜를 본 측면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작년 <그린북> 같은 영화에 작품상을 안길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을 의식하는 아카데미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를 '안전하게' 보여준 <기생충>에 동의했다는 겁니다.
현대 사회의 종합 예술이라는 영화는, 거기에 생계를 건 수많은 스태프만 떠올려도 분명 '산업'입니다. 기생충의 오스카 정복은 결국 영화 산업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려줬습니다. 그 어떤 좋은 영화도 CJ 같은 거대 자본 도움 없이 세계인들 마음에 두루 다가가기 어려운 냉정한 현실을 깨닫게 한 셈입니다. 멕시코 영화인들이 수 년째 오스카 시상식을 지배한들, 멕시코 영화를 세계 영화 산업의 주류라고 하지는 않지요.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서, CJ가 '될 영화'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 영화인들이 내놓을 많은 작품들에도 두루 기여하길 바라는 이유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4관왕 달성 후 포즈를 취하는 봉준호 감독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후 시상자와 껴안은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후 무대 위로 모인 '기생충' 출연진들 및 관계자들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한 '기생충'의 기우 역 최우식 배우 |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과 연교 역의 조여정 배우 |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4관왕 달성 후 포즈를 취하는 봉준호 감독 |
미국 LA 더 런던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로피와 함께 포즈를 취하는 봉준호 감독 |
노동규 기자(laborstar@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