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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바위에서 내 머리 깬 남편, 나를 산꾼 만든 건 8할이 남편

'산줌마' 서울 송영아씨

서울 광진구에 있는 송영아씨의 집에서. 그녀는 남편 따라 산에 다녔다. 지금은 산에 다니는 걸 넘어 자전거, 수영, 달리기를 한꺼번에 즐긴다. 즉, 남편보다 더 바깥활동에 열성적이다.

“왜죠? 왜 그렇게 열심히 운동하죠? 건강을 위해서인가요? 그래서 더 오래 살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사랑 때문인가요? 남편과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게 좋은가요? 왜, 대체 왜 몸을 가만히 두질 않죠?”


마흔아홉 살 송영아씨는 서울에 살면서 수영, 달리기, 트레일러닝, 암벽등반,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운동에 빠져 산다. 인터뷰 끝에 그녀에게 운동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물어볼 작정이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비슷한 나의 질문에 대부분 “재미있으니까” 혹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답을 말했다. 나는 그저 송영아씨가 운동에 집착하는 본래 이유를 더 깊이 연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고민했다. 이 인터뷰의 목적은 무엇인가? 독자들에게 산에 다니는 사람의 철학, 지혜 같은 걸 전달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어떤 지식인의 말을 참고해서 어렵게 꼬아보자.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건 고달프다고 탄식한다. 그 고달픔을 이겨내게 하는 건 목적이다. 즉 삶의 의미다. 이것에 따르면 송영아씨는 본인 삶에 어떤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몸을 움직이면서 재미를 느끼고 여기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것이다. 아, 어렵다. 송영아씨는 내가 정한 이 해답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며 갸우뚱 할것 같다. “뭘 굳이 이렇게까지.”


이 인터뷰의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인가? 그저 한 사람의 인생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향이 어디고, 어디서 살며, 직업은 무엇이고, 직장에 다니면서 어떻게 해외여행을 다니는가? 그것을 더 길게 늘어놓고 관찰하는 일은 나름 의미 있다. 그 속에 분명 공감 포인트가 있을 테고, 그걸로 지금 산에 다니는 우리들의 삶을 비춰보는 것이다. 

거제도에서 만난 송영아씨. 트레일러닝 대회에 참가하는 남편 따라서 왔다. 그녀는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근처에서 달리기를 하고 자전거를 탔다.

남편이 돌 떨어뜨려

송영아씨는 지금 서울 성수동의 반도체 부품 공급회사에 다닌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 3층으로 올라갔다. 회사 간판이 눈에 별로 띄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화했다. “저, 여기 3층 올라왔는데요.” 그녀가 대답했다. “네, 잠깐만요.” 복도 중간에서 문이 열렸다. 사무실은 작았다. 책상 두 개, 큰 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사장과 둘이서만 일한다고 했다. 사장은 퇴근하고 없었다. 그녀는 여기서 2008년부터 일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까?


“사무실이 작죠? 매출이 그렇게 크지 않은 회사예요. 전력반도체 부품들을 수입해서 공급하는 일을 해요. 사장님은 큰 업체 담당이고, 저는 작은 업체를 담당해서 부품들을 거래처에 납품해요. 주문 들어오면 접수하고, 포장해서 상품 보내고. 주문 상품을 직접 수령하러 가기도 하고 수금도 하고요.”


잠깐, 여기서 그녀의 아웃도어 경력을 살펴보자. 먼저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해외 등반여행 꽤 다녔다. 한번 나가면 보름에서 한 달, 길게는 두 달 정도 외국에 있다가 귀국했다. 2011년엔 미국 비숍, 요세미티, 조슈아트리 등을 돌았고, 2014년엔 스페인 로데야르에 다녀왔다. 2016년엔 그리스 칼림노스, 2018년엔 스위스 체르마트, 매직우드, 프랑켄유라를 보고 왔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가 보통 회사는 아닌 것 같았다. 일반 직장에 다니면서 저처럼 돌아다닐 수 있을까? 나는 감탄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신의 직장이군요! 회사 복지가 좋은 것 같은데요?”


“복지는 그저 그래요. 어디 갈 때는 퇴사를 해요. 한달 정도 외국에 있다가 돌아와서 사장님께 전화해요. ‘사장님, 저 다시 갈까요?’ 그럼 사장님이 다시 오라고 해요. 그것이 벌써 다섯 번쯤 된 것 같은데.”


그녀가 이 회사에 입사한 계기는 남편을 통해서다. 회사 사장은 남편 선배의 아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이 회사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은 이걸 송영아씨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 뒤로 15년간 그녀는 회사와 동고동락했다. 


“이 회사에 들어온 건 운이 좋았다고 해야 되나요?”


“그렇죠. 운 좋았죠. 사장님 잘 만났죠.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옛날에 제가 학교에서 일했던 때처럼 복잡하거나, 사람 상대하면서 영업을 하거나, 그러지 않아도 되고요. 저, 영업은 진짜 못 해요. 이 회사 들어올 때도 영업은 못 한다고 했어요.”

거제도 스포츠파크에서 송영아. 그녀는 오픈케어에서 철인 3종 수업을 듣고 있다.

고진감래라고 하지만 그녀가 고생 끝에 행운을 만난 건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송영아씨의 인생은 대체로 평탄했다. 1975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서 취직했다. 전공이 전자 계산 쪽이었고, 그에 따라 한국전력공사 전산실에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긴 했지만 공부를 더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송대학교 전자 계산학과에 입학 원서를 냈고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살짝 엇나가기 시작했다. 남편 곽영식씨를 만난 것이다.


“당시 방송대에 동아리가 많았어요. 입학식 전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동아리 사람들이 나와서 홍보하데요. 자기네 동아리 가입하라고. 이때 남편이 방송대 산악회 등반대장이었어요. 그 사람이 설명하길, 자기네는 산에도 가고 공부도 한대요. 이상하게 그때 산에 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입했죠. 그런데 이 인간들이 학교 수업 마치고 밤 12시까지 술을 마시는 거예요. 주말이면 또 산에 가고. 산에 가서 등반도 가르쳐주고. 그렇게 설악산도 가고 지리산도 가고 했어요. 그때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1996년쯤 됐지? 아마.”


그녀는 산에 가는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걸 더 즐겼던 것 같다. 산악회에 가입하기 전 그녀는 취미생활을 하지 않았고, 더욱이 산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 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꿈 같은 것도 없었다. 취직해서 돈 버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목표가 하나 더 있긴 했다. 방송대를 나와 4년제 학위를 따는 것. 4년제 학위를 따고 딱히 뭘 하자라는 욕심은 없었지만 사회 분위기 상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연애하느라 졸업을 못한 것이다. 그녀가 가진 얼마 없는 목표를 날려버린 사람이 남편 곽영식씨다. 


“1997년인가? 여름 휴가를 3박4일로 잡고 울산바위에 가자고 했어요. 그때 멤버가 딱 세 명이었어요. 저랑 남편 그리고 선배 하나. 그렇게 울산바위에 등반하러 갔는데, 내가 맨 마지막으로 올라가고 있었어요. 얼마 후에 위에서 돌이 떨어지더라고요. 남편이 발을 잘못 디뎌서 생긴 낙석이었죠. 그걸 머리에 맞아 피가 철철 나왔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어요. 일곱 바늘이나 꿰맸어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았죠. 그러고도 3일 동안 잘 놀았어요.”


“남편이 일부러 돌을 떨어뜨린 건 아니었을까요? 송영아씨에게 관심을 가지려고요.”


“아니래요. 자기는 그때 다른 사람이 더 마음에 들었었대요. 후보가 둘 있었는데, 그중에서 산에 진짜 잘 다니고 암벽등반 잘하는 여자랑 사귀면 좋겠다고 생각했대요. 선배가 이런 말을 하긴 했어요. ‘니가 쟤 머리 깨뜨렸으니까 책임져.’”


어쨌든 둘은 학교 다니면서 자주 붙어다녔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학교 졸업에 실패했고, 대신 결혼에는 성공했다. 결혼 후에도 송영아씨는 일을 쉬지 않았다. 용산에서 컴퓨터 프로그램 교육용 책자를 만드는가 하면 초등학교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일하기도 했다. 물론 산에도 다녔다. 부부는 함께 실내암장에 다니면서 볼더링을 했고, 선운산에서 각자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그녀는 클라이머이기도 하다. 한때 선운산에서 5.13급 프로젝트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녀는 클라이머이기도 하다. 한때 선운산에서 5.13급 프로젝트에 매달리기도 했다.

아이가 없어도 좋다


송영아씨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산에 다니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문득 궁금했다. “남편이 좋은가요? 산이 좋은가요?” 


“당연히 남편이 좋죠. 혼자서는 산에 안 갈 것 같아요.” 


“그렇다면 남편을 따라다녔다고 하는 게 맞을까요?” 


“그렇죠. 따라다녔죠.”


그녀는 과거형으로 대답했다. 예전에는 따라다녔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분위기다. 남편 곽영식씨에 따르면 요즘 송영아씨는 밤 10시쯤 돼야 자전거를 끌고 집에 들어온다. 최근 그녀는 철인 3종 경기에 선수로 나갔고, 그 훈련을 마치는 시간이 대략 그쯤이었다. 송영아씨가 이처럼 남편과 떨어져 운동을 더욱 자발적으로 참여한 계기는 달리기를 하고부터다. 물론 이것도 남편이 권해서 시작했다.


“남편이 권하기도 했지만 체중 조절을 하려고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거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돈 내고 프로그램도 수강했어요. 물론 남편하고 같이 했죠. 그런데 남편은 여기서 잘 못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저는 같은 또래 언니들이랑 노는 게 엄청나게 재미있었어요. 요즘 남편이 저한테 불만이 많아요. 집에 들어가면 ‘재밌냐?’라면서 퉁명스러워요. 자전거를 타면 위험하다는 둥,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둥, 그런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등반에 집중하라는 둥 투덜대요.”


송영아씨는 수영장에서 500m를 13분 안에 주파해 철인 수업 자격 테스트에 통과했다는 이야기, 달리기 코치가 재능있다고 칭찬한 이야기, 클릿 슈즈(자전거 페달에 발을 고정시킬 수 있는 신발)를 신고 처음 자전거를 탄 이야기 등 이야기를 좔좔 쏟아냈다.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자녀’ 문제가 나왔다. 송영아씨에게서 활활대는 투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건아이가 없어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그녀는 뜻밖의 답을 했다.


“혹시 아이가 없어서 허전하거나 아쉽진 않으세요?”


“전혀요. 물론 간절했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결혼을 했으니까 당연히 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때 애가 생기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이 생활이 너무 좋아요.”


아이 문제와 관련해 이처럼 덤덤해지기까지 그녀는 마음고생 많이 했다. 두 사람 모두 몸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임 판정을 받고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우울해졌다. 어떻게든 치료하려고 3년간 병원에 다녔다. 시험관 시술까지 받았다. 계속되는 시술과 복용하는 약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너무 힘들어서 남편에게 말했다. “애가 꼭 있어야겠냐”고. 남편도 그만하자고 했다. 그 무렵, 용한 점쟁이를 소개받아 점을 봤다. 점쟁이는 두 사람 사주에 애가 없다고 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송영아씨는 이때부터 뭐든 쿨하게 받아 넘겼다. 


“내 운명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자전거와 함께 선 송영아씨.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즐겼다. 트라이애슬론은 올해 첫 도전이다.

자전거와 함께 선 송영아씨.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즐겼다. 트라이애슬론은 올해 첫 도전이다.

마음속에 쓰나미가 한바탕 쓸고 지나갔을 때 남편이 같이 운동하자면서 송영아씨를 실내스포츠클라이밍센터로 끌고 갔다. 덕분에 황량했던 마음은 금방 회복됐다. 그녀는 웃으면서 당시의 남편 뒷담화를 했다.


“치료할 때 남편이 엄청나게 미웠어요. 나 혼자 아무 것도 못하는 상황인데, 힘들어 죽겠는데, 혼자 술 마시러 다니고. 새벽에 길바닥에서 잡아온 적도 있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이뻐요.”


여기서 남편 곽영식씨의 사연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가 산꾼, 운동 마니아가 된 건 남편 역할이 80% 정도 차지하고, 두 사람이 서울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꾸리는 데 절반의 지분이 있으니까. 


“남편이 대학을 안 나왔어요. 대학 입학 시험에 세 번 도전했는데 다 떨어졌대요. 그런데 유일하게 붙은 데가 해병대예요. 제대한 뒤 다시 대학에 갈까, 취직할까 고민했는데, 그냥 취직하기로 했대요. 그래서 지하철공사 입사 시험을 봤어요. 당시에는 학력 제한이 없었거든요, 아무튼 합격한 거예요! 그게 신의 한 수였어요. 그때 남편 친구들은 대학 졸업하고 일자리 구할 때였는데, IMF가 터진 거예요. 아무도 취직하지 못했을 때 남편은 일자리를 구했죠. 참 운이 좋았어요.”


일이 여유로운 건 아니었지만 남편은 비교적 자유롭게 휴가를 썼다. 덕분에 세계여행을 많이 다녔다. 남편의 취직을 가리켜 ‘신의 한 수’,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건 지금 생활이 더할 나위 없다는 뜻이다.


송영아씨의 집은 서울 동서울터미널 부근이다. 오래된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다. 그동안 수차례 이사 다녔다. 맞벌이 생활 꽤 했는데도 집을 장만하지 못했다. 사연이 좀 있다.


“시기를 계속 놓쳤어요. 해마다 전세금을 늘리면서 돈을 모으고 있는데, 그럼에도 집을 사려면 2억~3억 원 대출을 받아야 했어요. 그러면 한달 이자가 100만 원 이상 나가요. 그게 너무 아까웠어요. 주변에서 한국 부동산 망한다는 얘기도 많았고요. 망설이다가 이렇게 됐죠.”


나는 좀 의아했다. 해외 여행 다닐 돈을 모았다면 보태서 집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덧붙였다. “지금까지 여행다닌 돈을 합쳐도 서울에 집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해요!” 부부는 서울 대신 멀리 전남 장성에 집을 마련했다. 550평쯤 되는 대지를 1억 5,000만 원에 구입해 그 위에 있던 낡은 집을 개조했다. 이른바 부부의 별장이자 노후 대책인 셈이다. 두 사람은 10여 년 뒤 서울을 떠날 생각이다.

지난 7월 초 세종시에 열린 트라이애슬론 경기에 나가 45~49세 여자 동호인 부문에서 14등을 기록했다.

당연하죠, 물론이죠!


“남편과 함께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건 좋은 걸까요?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나요?”


“저는 좋아요. 진짜 좋아요. 완전 강추해요. 어쩔 땐 서로 경쟁하기도 해요. 그러면서 대화가 되죠.”


“결혼 생활한 지 23년 째죠? 남편이 친구같겠어요.”


“그렇죠. 친구죠. 싸우는 일 거의 없어요. 남편이 가끔 술을 많이 마시는데, 술 그만 마시라고 하는 정도?”


“두 사람에겐 돈이 중요한가요? 즐거운 삶이 중요한가요?”


“당연히 재밌게 살자는 주의죠. 노후를 생각하면 돈이 또 중요하긴 한데, 아등바등하지는 말자고 했어요.”


“저축은 하나요?”


“하하하, 물론이죠. 수입의 3분의 1 이상 해요. 그런데 올해 돈 쓸 일이 많았어요. 자전거를 샀고요, 철인 장비도 좀 샀어요.”


“7월 초에 철인 3종 시합에 참가했죠? 어땠나요?”


“당연히 잘했죠(그녀는 트라이애슬론 표준거리 수영 1.5km, 사이클 40km, 달리기 10km 부문에 출전해 45~49세 여자 동호인 부문에서 14등으로 골인했다).  “


“60세가 되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상상되나요?”


“글쎄요, 시골에서 정원을 가꾸고, 조그마한 텃밭을 일구면서 살 것 같아요."


송영아씨는 별명은 ‘집토끼’다. 본인이 지었다. 토끼띠라서 그렇고, 야생 토끼보다 집토끼가 좀 더 순한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송영아씨는 그 이미지를 좇아 사는 중인가? 어떤 질문을 해도 생글생글 웃었다. 

방 한 구석에 각종 아웃도어 장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남편과 공동으로 쓴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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