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존슨 울린 아줌마 어쩌다 산악회장 됐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이정애 박사가 일하는 사무실. 일반 사무실과 다를 게 없다. 굳이 다른 걸 꼽자면 등산복을 입고 출근해도 괜찮다는 것 |
*벤 존슨 : 전 캐나다의 육상선수로 1988년 서울 올림픽 100m 종목에서 9.79초로 세계기록을 세워 금메달을 땄지만 도핑 검사 후 불법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밝혀져 기록과 메달 모두 박탈됐다.
‘굳이 하는 일’은 세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에 더해 굳이 또 나서서 하는 일은 분명 여러 사람에게 이롭다. 그것은 자기만족에 의한 경우가 많을 텐데, 이런 점에서 ‘굳이 하는 일’은 예술가의 작품 활동과 같다. 삶을 더 세밀하게 가꾸는 일이라고 할까?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디테일한 요소에 신경 쓰고 다듬는 것, 이것을 굳이 하는 일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산에서 굳이 하는 일의 대표격은 산악회 회장을 맡는 것이다. 회원들의 즐거운 산행을 위해 매달 혹은 매주 산행을 기획하고, 회비를 걷고, 이따금 선물도 준비하고, 창립기념식, 시산제를 챙기고. 이런 방대하고 귀찮은 일은 대다수의 일반 산악회 회장들이 굳이 손수 벌인다. 말하자면 그들은 삶을 가꾸는 디테일의 왕이다. 그들이 없으면 산에서 들리는 사람 웃음소리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이번 산줌마는 산악회 회장님이다.
이정애 박사의 출근 복장. 자율이다. 실험실에 갈 땐 긴팔, 긴바지, 안전화가 필수다. 옛날엔 규율이 엄했는데, 지금은 많이 완화됐다고 한다. |
어느 날, 어떤 선배에게 카톡이 왔다. 스마트폰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산악회 창립 50주년, 월간산 소개 기사 요청.’ 끝에 붙은 담당자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자가 받았다. 그녀는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월간산이죠? 저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이정애 연구원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키스트KIST산악회가 50주년을 맞았어요. 월간산에 소개하고 싶어서 연락했습니다.”
예감이 좋았다. 어떤 산악회인지, 산악회 소개 기사를 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제쳐두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네, 혹시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저 63년생이에요. 올해 딱 만으로 60이에요.”
“그럼, 결혼하셨죠?”
“네, 물론 했죠. 애들이 둘 있어요.”
찾고 있던 산줌마였다. 속으로 환호했다. 나는 그녀에게 산악회와 더불어 그녀 또한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했다. 연구소로 오라고 했다.
“하하하, 그래요. 저보다는 산악회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정확히 누굴까? 명함에 적힌 소속과 직책을 나열하니 A4용지 한 줄 가득 찬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혁신기업협력센터(생체분자인식연구센터) 이학박사/책임연구원’
짧게 줄이면 연구원, 박사 혹은 과학자다. 키스트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2012년부터 그녀가 쓴 논문 목록이 나왔다. 35개다.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나는 이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그중 가장 최근 것의 제목을 복사해 구글 번역기로 돌렸다. <불화수소 노출 후 자연적으로 약화된 토양에서 자란 식물의 대사체 및 전사체 분석> 제목이 어려웠다. 내용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이른바 그녀는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 그녀가 산에 다니지 않았다면 내가 과학자를 만날 확률은 극히 적다. 과학자에게 이것 저것 캐물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안전한 먹는 물 관리 연구가 최근 그녀의 과제다. 연구 과정과 결과가 담긴 두꺼운 책이 수십여 권 된다 |
그녀가 일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키스트라고 부른다. 한국과학기술원 카이스트KAIST와 다르다. 카이스트는 학교고 키스트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카이스트는 대전에 있고, 키스트는 서울 성북구에 있다. 이정애 박사 앞에서 나는 “카이스트에는 처음 왔다”고 했더니 그녀는 “키스트”라고 콕 집었다. 키스트 건 카이스트 건 과학자를 눈앞에 두고 나는 설다. 어렸을 때 내 꿈은 과학자였다. 그녀는 과학자로서 내 앞에 섰는지 아니면 산악회 회장으로서 마주한 건지 헷갈려 했다. 나는 말했다.
“저는 박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산에 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뭔가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고 봐요. 왜냐하면 산에 가는 건 꽤 복잡한 일이니까요. 일단 산에 오르는 건 힘들잖아요. 박사님 인생의 어떤 지점이 박사님을 산으로 떠밀었다고 생각해요.”
10년 동안의 기억이 없다
그녀는 알겠다고 했다. 나는 질문을 시작했다.
“공부 잘하셨을 것 같은데요? 수재 소리 듣지 않았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공부 좀 한다 정도였죠.”
“그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등이요?”
“아니에요. 저 공부 잘하지 못했어요. 상위권 꼴찌였어요.”
이정애 박사는 서울 동작구에 있는 강남초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는 중앙대학교 부속 중학교, 고등학교는 진명여고를 나왔다. 학사는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는 고려대학교에서 땄다. 이만하면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특출난 학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 궁금했다. 그녀는 어쩌다가 연구원이 됐을까? 이정애 박사는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미국 드라마 <6백만 달러의 사나이>나 각종 SF 소설을 읽는 것이 재미었었다. 그녀는 특히 생명과학 쪽에 끌렸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신체 여러 기관을 부품 교환하듯 바꾸면서 영원히 사는 어떤 SF 소설을 읽고 ‘이거 괜찮네’라고 생각했다. 과학자에 대한 꿈은 딱 그 정도였다. ‘괜찮네’ 수준, 누구도 그녀에게 과학자가 되라고 권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절실하진 않았다. 부모님은 그녀가 선생님이 되길 은근히 바랐다. 대학교는 성적에 맞춰 ‘화학과’에 들어갔다. 별 일 없이 학교에 다녔다면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연구소에서 연구원 모집 공고가 떴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곧 있을 ‘88 서울 올림픽’ 준비에 들떠 있었고, 마침 선수들이 복용하는 약물을 분석하는 팀의 팀원을 뽑았던 것이다. 당시 친구가 그녀에게 말했다.
“야, 정애야. 나 여기 원서 넣었어.”
취업이 목표였던 그녀도 친구 따라 원서를 넣었다. 시험을 봤고 결국 붙었다. 그녀는 이때 흥분해서 말했다.
“벤 존슨 알죠? 제가 그 사람 잡았던 팀에 있었어요. 그 사람 키 정말 컸어요. 피부도 완전 까맣고. 눈만 하얗고.”
아무튼 그녀는 당시 과학자로서의 사명감은 얼마 없었다. 연구소는 단지 직장이었다. 직장 생활을 유지하려고 그녀는 1986년 아시안 게임이 열릴 즈음 석사를 땄고, 1990년 지나 박사가 됐다.
“박사님의 삶은 평지네요?”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살짝 눈시울을 붉힌 것 빼고 그녀는 내내 웃었다. 행정학 박사인 남편은 대학 때 만나 8년 연애 후 결혼했다. 딸 둘도 있다. 집은 서초동. 도중에 좌절한 일이 있다거나 큰 고통을 겪었다거나 하는 식의 변곡점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걸 찾기 위해 그녀가 하는 답변마다 물고 늘어졌지만 빈틈이 없었다. 며칠 후 사진 촬영 차 또 그녀와 만났다.
그녀가 사용하는 오래된 컵. 이정애 박사는 88 서울 올림픽 때 선수들 약물 분석 팀에서 일했다. 스테로이드와 관련 깊다 |
사무실에 다시 와보니 벽에 걸린 칠판에 없던 낙서가 하나 생겼다.
‘♥혀니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
이정애 박사의 둘째 딸이 써놓고 갔다고 했다. 옳거니! 그녀에게서 가족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떨어져서 산 햇수가 10~15년 정도 된다. 그녀가 미국으로 1년 정도 떠나 있었고, 한국에 돌아와선 남편이 제주도에서 15년 정도 일했다. 주말부부였다. 그렇게 남편과 떨어져 있을 때 두 자녀는 이정애 박사 혼자 키우듯 했다.
직장생활과 육아, 어떤 것이 더 힘들까? 어떤 남자는 육아가 더 힘들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가 수없이 많다면서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 가득찬 곳이 지옥이라고 믿고 있다. 그녀도 그랬을까?
“혼자서 두 자녀를 키우는 게 힘들지 않았나요?”
“힘들었나? 그때는 그게 힘든지 뭔지 몰랐어요.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아무 생각이 없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걔네들 키우는 10년 동안의 기억은 별로 없어요. 그때 생각이 통째로 없어졌어요.”
나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요? 당시 많이 힘들었나보죠? 남편에게 불만이 없었나요?”
“불만을 가질 ‘저기’가 없었죠. 남편을 만날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불만 있다고 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요. 말해 봤자 싸움만 나죠. 우리 세대가 그랬지만 지금도 여자들 대부분이 그럴 거예요. 결혼하면 여자들이 짊어져야 할 일들이 많아요. 그걸 힘들다 어쩌다 하면 못하는 거죠. 아무 생각 없이 해야 돼요. 그러니까 기억이 없는 거예요.”
사무실 벽에 걸린 화이트 보드 풍경. 화학 공식이 어지러운 가운데, 둘째 딸의 낙서가 눈에 띈다. |
항상성과 산
이정애 박사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산에 가는 걸 좋아했다. 많이는 아니고 남편 혹은 친구들과 가끔 산에 갔다. 키스트산악회에 가입한 건 마흔 살 무렵이다. 두 자녀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다. 이때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일주일에 하루, 토요일에만 산악회 사람들과 산에 갔다. 산에 오르는 건 힘들었지만 ‘편’했다.
“제가 좀 소심해요. 몸을 많이 사려요. 대학교 때도 산에 관한 동경은 있었는데 거기에 빠질 용기는 없었어요. 그래서 산악부, 뭐 그런 곳도 못 들어갔죠. 그러다가 애들 어느 정도 키우고, 키스트 산악회도 망설이다가 들어갔어요. 겁이 났거든요. 그런데 되게 편했어요. 우리 연구소는 직급이 천차만별이고 서열도 딱 정리되어 있거든요. 산악회 가니까 그런 게 없었어요.”
“지금 산악회 회장을 맡은 걸 보니 애정이 많은 것 같아요. 키스트 산악회가 왜 좋죠?”
“산악회 다니면서 즐거웠어요. 키스트의 웬만한 사람들을 알게 됐고요. 이분들이 꽤 전문적이데요? 산에 가면 맨날 뭘 가르쳐줘요. 저 산은 어떤 산이고, 저 능선 이름은 뭐고.”
“단지 그것뿐인가요? 이런 이유로 산악회 회장을 덜컥 맡을 순 없을 텐데요.”
“제가 얘기했잖아요. 20년 그렇게 다니면서 되게 재밌었고, 많은 걸 느꼈으니까. 선배들한테 배운 것도 많고요. 아, 산에 가면 제가 언제나 꼴찌였어요. 그런 저를 항상 뒤에서 지켜주는 선배가 있었어요. 그분들 절대 저를 버리고 간 적이 없어요. 얼마나 고마워요? 그런 다정함이 지금도 생각나요. 그런데 그 선배들 전부 퇴직했죠. 저밖에 안 남았어요. 그렇다고 산악회를 없앨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내 선에서는 없애지 말자고 마음 먹었죠.”
이정애 박사의 산행 복장. 인터뷰를 위해 특별히 아크테릭스를 챙겨 입었다. 그녀는 저렴한 등산복 마니아다. |
그녀가 말해 준 연구소 생활은 보기와 달리 치열하다. 정부에서 주는 과제를 따야 하고 심사 받은 후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논문도 써야 한다. 까딱 소홀하면 월급이 깎이고 해고당할 수도 있다. 일이 힘들어서 관두고 싶을 때마다 그녀는 남편을 협박한다.
“나 회사 관둘 거야. 당신이 알아서 해!”
다른 직장과 똑같이 연구실은 숨막히는 가스실 같다. 여기서 생존하기 위해 날카롭던 사람들이 산에 가면 다정하게 바뀌니 그녀는 산악회 생활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박사님께 가장 즐거운 건 뭐죠?”
이정애 박사가 대답했다.
“나 그런 것 별로 없는데 어떡하지?”
“산악회 활동이 즐거운 것 아닌가요?”
“그게, 지금은 즐겁다기보단 의무감으로 하고 있죠.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라면서요. 다른 사람이 세운 산행 계획에 아무 생각 없이 쫓아다니는 거, 그게 즐거움이었죠.”
“산악회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즐거움도 있을 텐데요?”
“제가 주도적인 삶을 좋아하진 않아요. 귀찮아요. 그런 거.”
“음, 연구원의 삶은 주도적인 것과 상관 없나요?”
“어떤 분야를 선도하고, 막 나서는 건 주도적이겠죠. 하지만 적정선에서 하는 것들은 주도적인 건 아니라고 봐요. 그거 얼마나 힘들어요? 일이 수행될 때까지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왜 안 되는지 찾아야 하고. 얼마나 복잡한 일이에요. 물론 제가 지금 그렇게 살고는 있지만 아주 적극적인 건 아니에요.”
그녀는 도봉산에 갔다가 심장 쪽에 문제가 생겨 119 구조대원들에 의해 실려 내려온 적 있다. 산에서 대형 사고를 겪었으면서도 계속 산에 다니는 한편 산악회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또 인터뷰 때 연구소 뒷산에서 만난 직장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번 주에 청계산에서 산악회 모임 있는데, 오세요! 꼭 오셔야 해요.”
나는 헷갈렸다. 어떤 것에 열성적인 태도와 주도적인 삶은 다른 건가? 그녀는 정말 산을 좋아하는 건가? 싫어하는 건가? 나는 캐물었다.
그녀의 등산화. 발가락 부분이 온통 해졌다. 산에 많이 다닌다는 증거다. |
“산이 왜 좋은가요?”
“그냥, 저는 산 정상에서 상쾌한 바람 맞는 일, 그럴 때 기분이 좋아요.”
“좀 더 구체적인 느낌이 알고 싶어요. 그런 감정이랑 비교될 만한 게 있을까요?”
“음,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하늘 보고 누웠을 때, 추운 겨울 산 꼭대기에서 맞는 찬바람, 그런 상쾌함! 그것 말고는 없는데요.”
“그럼 산에서 느끼는 좋은 감정은 박사님이 가진 좋은 것들 중 최고라고 해도 될까요?”
“네, 그런 셈이죠.”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로 좋은 것에 마음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나는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산 좋아하는 누구나 자신만의 ‘산’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서 느끼는 상쾌함 때문에 산에 간다는 건 습관 같은 표현일 것이다.
이정애 박사가 자신이 가진 에너지 상당수를 산에 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답을 어떤 질문을 해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사무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시선이 갔다. 거기엔 알아보기 힘든 화학 기호들이 나열돼 있었다. 상식 선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현상에 과학 이론을 대입하면 명쾌하게 답이 나올 때가 있다. 나는 그것들이 뭔지 이정애 박사에게 물었다.
“하이드록시 스테로이드 디하이드로게네이즈, 스테로이드의 하이드록실 그룹, 오에이치 그룹이 있거든요. 오에이치 그룹을 없앤다, 안 없앴다 하는 것이고요. 에스트로게니즘, 하이퍼 안드로게니즘,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 등 항상성 유지에 관한 것이에요.”
설명을 듣고 나는 만세를 외쳤다.
“항상성! 박사님이 산에 다닌 것, 산악회 활동에 매달리는 건 어쩌면 신체나 정신의 불균형을 메우기 위한 것일 수도 있군요?”
이정애 박사가 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너무 막 갖다 붙이는 것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