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호수를… 3,000m 산에서 만나다
[신영철의 산 이야기] 비숍패스 트레일
롱 레이크는 이름대로 바나나를 닮은 듯 길게 이어져 있었다. |
“금 중에서 가장 비싸고 귀한 ‘금’이 어떤 금인지 아세요?”
“금? 뜬금없이 웬 금타령? 질문 의도를 보니 황금, 백금은 아닐 거고… 맞다! 생명에 꼭 필요한 소금. 황금은 없어도 살지만, 소금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으니까. 정답 맞지?”
“와! 그것도 말은 되네요. 하지만 내가 요구한 답은 바로 ‘지금’입니다.”
정 시인의 썰렁한 주장은 그랬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지금 열심히 살자고. 워낙 삶에 돌발변수가 많아 긴 호흡으로 계획을 세워봐야 몽상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는 주장. 그 말의 설득력 때문에 산행에 나선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LA를 떠났고, 시에라네바다산맥 동쪽Eastern Sierra의 비숍Bishop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비숍은 강원도 속초시와 닮은꼴의 지방도시. 속초에서 대청봉과 백두대간이 보이듯, 비숍 뒤편으로 시에라네바다 준령이 지붕처럼 솟아 있다. 비숍은 산행, 클라이밍, 볼더링 등 산악활동에 최적화된 곳으로 이미 세계에 소문나 있다.
시내에 있는 레인저 스테이션에서 신청한 허가증을 받고 산맥을 향해 뚫려 있는 168번 오름길을 달렸다. 고산준령이 정면에서 드넓은 화면 속으로 우리를 빨아들이는 느낌이다. 당일치기 산행엔 허가증이 필요 없다. 그러나 야생에서 하루 이상을 보내려면 허가는 필수.
엄격한 미국에서 허가 없이 산행에 나서는 건, 독사 약 올리는 일이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예약해 놓은 제프리야영장은 훌륭했다. 소나무 그늘과 계곡의 맑은 물이 곁에 흐르고, 식탁과 바비큐 그릴에 수세식 화장실까지. 하루 28달러라는 돈이 아깝지 않다.
며칠치 챙겨온 음식을 철제 곰 상자에 넣었다. 냄새 나는 음식과 물건을 차에 두는 행위는 위험하다. ‘곰의 나라’라는 별칭이 어울리는 시에라산맥. 우리 같은 손님은 당국이 시키는 대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올해 봄, 산에서 그런 예의를 지키지 않은 자동차를 본 적이 있다. 산행을 끝내고 내려와 보니 모두 4대의 자동차 유리창이 박살 나 있던 것. 식탐과 호기심 많은 곰의 짓이다. ‘우리 차가 아니라 고맙다’는 생각과, ‘꼭 법 지키며 산행하자’는 착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스피어헤드호수의 녹색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물색과 호안의 갈대밭. |
해발 3,000m대의 호수 천국
아침에 산행 들머리인 사우스호수로 차를 몰았다. 놀랍다. 2021년 8월, 거대했던 호수는 천년 만의 최악이라는 가뭄으로 하얗게 바닥이 드러나 있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던 호수가 생뚱맞은 풍경으로 바뀌어 있다. 물을 더 가둬 수량을 높이기 위해 인공적으로 쌓았던 댐 흔적도 드러나 있다.
이번 산행은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일부러 시원하고 멋진 호수를 잇는 루트를 찾아온 것이었다. 기대치가 높았는데 은근히 걱정이 든다. 그러나 이번에 몰랐던 비밀을 알았다. 사우스호수와 인근의 유명한 사브리나호수는 인공이 가미된 댐이었던 것.
비숍의 식수와 전기발전을 위해 제방을 높였고 언제나 아름답게 물이 차있었기에 몰랐다. 가뭄이 호수의 민낯을 보여 준 셈. 그러나 우려 속의 산행에서 만난 다음 호수는 말 그대로 찰랑찰랑 넘치도록 물이 가득하다. 고마운 일.
늘씬한 소나무 숲길을 걸어 허드호수를 지나고 초콜릿호수 갈림길에 섰다. 그쪽으로 가면 호수를 4개나 더 만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호수의 정의定義가 궁금해진다. 지도를 보면 시에라네바다산맥엔 수없이 많은 호수가 존재한다. 웅덩이부터 서울시만 한 크기. 아무리 구글링을 해도 호수의 개수를 알 수 없었다. 물론 그중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호수도 부지기수.
톰슨Thompson산(4,115m)과 구드Goode산(3,988m)엔 8월인데도 아직 잔설이 남았다. 시에라산맥 길이는 600km가 넘는다. 이 고산준령엔 4,000m 가까운 봉우리가 무려 120개나 모여 있다. 태평양에서 몰려오는 습기는 이 산마루에 걸려 빙하와 눈으로 물 함정을 만든다.
이름 없는 작은 호수에 잠긴 주변 산의 반영과 징검다리가 정겹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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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 동쪽 무수한 주름은 모두 계곡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 병풍처럼 둘러싼 고봉이 물주머니 역할을 하고 격류와 폭포가 되었다가 종내 호수로 완성된다. 호수와 호수를 연결하는 물길 따라 고도를 높이는 등산로는 눈이 황홀해지는 풍경산행이 될 수밖에.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나무가 사라져간다. 고산에서는 수목 한계선 위쪽으로 풀과 야생화만 산다. 광대하고 거칠며 웅장한 산악 풍경에 더해진 고산 야생화 정원. 꽃, 호수, 바위가 어우러진 풍경은 정말 천상화원으로 부를 만하다. 식물학자들은 이 고산 지대에 피는 꽃 정원을 캘리포니아 최고의 야생화 전시관이라 부른다.
‘존 뮤어 광야John Muir Wilderness’ 표지판을 지나 ‘롱 레이크Long Lake’를 만났다. 이미 고도가 3,278m. 이 고산호수도 기특하게 가뭄을 견뎌내고 물이 찰랑이고 있다. 바나나처럼 긴 호안을 따라 걷다 보니 최악의 가뭄이라는 지금 미국 물 부족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산 위에 쌓였던 눈이 천천히 녹으며 호수로 흘러온 덕분일까. 그냥 마셔도 될 성싶은 투명한 물색. 이 높은 고도에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천연 호수가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마지막 비숍호수를 끝으로 매우 힘든 바위 너덜길이 시작되고 있다. |
삐쭉삐쭉 솟은 산에 버짐처럼 보이는 하얀 잔설이 여름을 버티고 있다. 스피어헤드호수를 만났다. 녹색물감을 풀어 놓은 물색과 물비늘이 호안의 갈대밭과 어울려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한동안 제프리 소나무 그늘에 앉아 믿을 수 없는 풍경을 즐겼다.
산이 내려 주고 땅과 바위가 받쳐 만든 호수.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든 아름다움은 이렇게 힘든 발품을 팔아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새들록호수를 지나자 수목한계선을 넘어 선 듯, 이제 키 작은 관목만 듬성하다.
흙보다 바위가 많은 마지막 비숍호수를 지났다. 목적지 비숍패스까지 매우 가파른 바윗길의 시작. 비숍고개는 킹스캐니언국립공원의 경계이며 뒷문 역할도 하고 있다. 이 산맥을 사랑해 산자락 요세미티를 국립공원으로 만든 존 뮤어John Muir. 그의 이름을 따서 이곳 광야Wilderness를 미국은 ‘존 뮤어 광야’로 지정했다.
무려 76마리나 되는 사슴이 한꺼번에 추락사한 흔적의 뼈. |
존 뮤어 트레일의 마약 같은 추억
존 뮤어가 만든 산악회인 ‘시에라클럽’ 후배들은, 그가 죽자 360km에 달하는 트레일을 이 산속에 만들었다. 요세미티에서 본토 최고봉 휘트니까지. 허가 받기 엄청 힘든 유명한 존 뮤어 트레일JMT의 탄생이다.
시에라산맥 대부분의 지역에서 JMT로 진입할 수 있는 들머리가 하나씩 있다. 이곳은 유일하게 사우스호수와 노스호수, 두 군데의 JMT 진입로가 있다. 우리처럼 비숍패스를 거치거나, 노스호수 쪽 파이우트 패스를 거쳐 JMT에 합류할 수 있다.
바위 너덜 길은 그늘이 없어 오름짓이 고역이다. 그러나 패스에 올라서면 믿지 못할 풍경이 기다리고 있기에 힘이 난다. 이곳에 여러 번 온 필자가 오래전에 썼던 책 <걷는 자의 꿈, 존 뮤어 트레일>에서 강조했던 대목이 있다. 이곳을 걷는 건 화첩산행畫帖山行이라는 것.
시에라산군 산행은 힘들고 고단해도, 모퉁이만 돌면 새로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마약과 같은 효과를 내 20여 일간 360km 종주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도 매년 잊지 못해 이렇게 다시 오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비숍패스에 선 필자. 정상 표시와 뒤편으로 펼쳐진 킹스캐니언국립공원. |
킹스캐니언국립공원 뒷문 비숍패스
깜짝 놀랐다. 오르던 바윗길에 무수한 동물 뼈가 보인다. 시나브로 기억난다. 분명 사슴 뼈일 것이다. 2017년 11월 20일 일어났던 사건의 흔적. 인연이 있는 곳이라 4년 전의 그 보도를 기억한다.
이곳에 서식하는 야생 사슴들은 늦가을 비숍패스를 넘는 게 전통적인 이동 경로. 그해 11월, 당연히 얼음이 얼고 눈이 내렸다. ‘레밍’처럼 맹목적으로 리더를 따르는 사슴무리들. 레밍은 ‘집단 자살 설치류’로도 알려진 나그네쥐라지만 동물 세계에서는 흔한 일.
리더 따라 가파른 돌길을 건너던 사슴들이 얼음에 미끄러지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겨울 산행을 즐기던 산악인이 그것을 발견해 당국에 신고했다. 조사해 보니 76마리의 사슴이 추락사했다. 끔찍한 일이지만 자연에서는 그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기적으로 이런 사고가 난다’는 당국의 통계가 있다고 했다.
목적지 비숍패스가 멀지 않다. 가파른 너덜이 끝나고 반대편 산군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산로엔 아직 잔설이 남아 있다. 올라오며 만났던 사슴 뼈 때문일까. 눈을 밟는 게 조심스럽다. 비숍고개는 넓고, 크고, 펑퍼짐했다. 멀리 비숍패스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 뒤로는 킹스캐니언국립공원. 등산로를 이어가 존 뮤어 트레일을 만났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 목적한 경계 표지판 곁 바위 그늘을 찾아 앉았다. 눈 밑 가라 앉은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한국은 대통령 후보 선출에 시장바닥이 되어 있다. 리더 선발의 중요함을 생각한다. 사슴 떼가 추락할 때 리더도, 무리도, 한 발짝 앞을 몰랐을 것이다. 리더 믿고 우르르 달리다 우르르 추락해 간 사슴들. 그러므로 잘 뽑아야 한다. 반면교사反面敎師다.
모든 금 중에서 ‘지금’이 제일 좋다는 정 시인의 농담이 생각나서일까. 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정 시인 얼굴이 문득 보기 좋다. 살아 온 세월이 고맙고, 살아 갈 세월도 고맙다는 각성. 삶은 힘들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렇게 지나온 길과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은 지금이 좋다. 앞으로도 가야 할 산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우리는 바람 좋은 산정에 앉아 아득한 눈 아래 풍경과 생각을 한동안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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