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안나푸르나 3대 비경, 나문 고개를 넘다
폭설로 포기해야 했던 4,850m 고개, 6개월 만에 다시 찾아
나문 라 코스는 오래전 포카라와 마낭을 잇는교역로였다. 이 코스에서는 람중 히말과안나푸르나를 볼 수 있는데, 특히 마나슬루가환상적이다. 또한 안나푸르나의 대중적인곳과 연결되어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 |
히말라야 트레킹을 자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실패하거나 포기하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폭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나문 라Namun La(4,850m)도 그중 하나였다. 봄에 갔던 곳을 6개월 만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 단순히 점을 찍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궁금해서였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폭설로 넘을 수 없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네팔은 대부분 혼자 다녔지만 무리하게 포터들을 줄이지 않았다. 인건비 역시 깎지 않았다. 싼 인력을 쓰면 전문성이 떨어지고, 그만큼 내가 고생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 사람들은 가이드나 포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싼 인건비만 따진다.
나는 그들의 경력을 인정해 조금 비싸더라도 검증된 사람을 고용한다. 내가 잘 아는 길이라도 가이드나 포터 중 한 명은 꼭 같이 간다. 그들만큼 나의 안전을 지켜 주고, 위기 대처에 강한 사람들도 없다. 내게 있어 그들은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나문 라 정상에서 포터들의 사진을 찍었다. 특별한 장소에서는 왠지 그런 의무감이 들었다. |
나문 라 트레킹은 보통 시클레스Sikles(1,980m), 상게Sange(1,100m), 쿠디Khudi(790m)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티망Timang(2,750m)에서 시작했다. 사실 이렇게 거꾸로 올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티망에서 단페 단다Danfe Danda(4,280m)까지 1,600m나 고도를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소 문제가 가장 크다. 이미 무스탕Mustang에서 25일간 걸은 나는 문제없었지만, 고소 적응 전이라면 반드시 낮은 곳부터 천천히 올라야 한다.
깊어가는 가을이라 올라가는 내내 입김이 나왔다. 밤새 내린 서리도 그대로였다. 시작부터 평지 한 번 나오지 않는 계단을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해발 4,000m가 가까워지자 구름이 차기 시작했다. 등 뒤를 지키던 캉가루 히말Kangaru Himal(6,981m)도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단페 단다까지는 6시간이 걸렸다.
밤사이 눈이 내렸다. 옷을 갈아입을 때면 얼음장이 스치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여기서 나문 라를 넘으려면 700m를 더 올라야 했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고개를 보며 얼마나 걸릴지 가늠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저 묵묵히 걷는 수밖에.
기대하지 않으면 기대 이상이 주어진다. 잠시 뒤돌아보다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감히 상상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거대한 마나슬루Manaslu(8,163m)산군과 페리 히말이 장군처럼 버티고 있었다.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보던 것보다 압도적이었다.
티망마을 뒤로 보이는 캉가루 히말은 걷는 동안 우리 뒤를 지켜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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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풍경을 만나면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약간의 수고를 더하면 이렇게 근사한 히말라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히말라야에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와 랑탕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나푸르나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고르라면 당연히 안나푸르나 3패스(3개의 고개)다. 나문 라는 캉 라Kang La(5,322m)와 메소칸토 라Mesokanto La(5,245m)와 더불어 안나푸르나 3패스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는 덜 알려졌지만 꼭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나문 라 정상에 도착 후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내가 스태프들과 사진을 찍는 곳은 고개 정상이 유일했다. 특별한 장소에서는 왠지 그런 의무감이 들었다.
나문 라는 추가 설명이 필요한 곳이다. 지도상 나문 라의 높이는 5,560m다. 어느 지도를 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넘는 곳은 4,850m다. 왜 지도와 다른 것일까? 그 궁금증은 후에 현지 여행사 사장을 만나면서 풀렸다. 그도 궁금해서 알아보다가 어느 독일 사이트에서 답을 찾아냈다. 해당 사이트에 의하면 지도상 5,560m 구간은 바위가 떨어져서 길이 막혔고, 그 뒤로 4,850m 고갯길이 새로 생겼다고 한다.
눈이 남아 있는 하산 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그런데도 포터들은 재빠르게 내려갔다. 그들은 체구가 작아도 힘이 좋고 잘 걸었다.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예전에 마칼루 지역에서 40일간 함께했던 요리사 체왕이었다. 그때는 요리사였는데 지금은 짐을 잔뜩 지고 있었다. 요리사는 짐을 지지 않는데, 그의 요리 실력을 알아주는 곳이 없었나보다.
하긴 같이 다닐 때도 썩 좋은 요리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다. 체왕 뒤로 수십 명이나 되는 포터들이 올라왔다. 더 내려가서는 60~70대로 보이는 백인 트레커 10명도 만났다. 서양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인지 이틀 동안 세 팀이나 만났다.
깊어가는 가을이라 내내 입김이 나왔다. 고도를 높일수록 밤새 내린 서리도 그대로였다. |
잠시 쉬는 동안 겔젠(클라이밍 셰르파)이 오른쪽 산 위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저 위에 두드 포카리Dudh Pokari가 있다며 ‘데레이 람므로 처, 데레이 툴루(아주 좋고 아주 크다)’라고 했다. 두드는 ‘우유’라는 뜻이니까 호수가 우윳빛인 모양이다. 두드 포카리는 신성한 호수로 8월이면 많은 순례자가 몰려든다.
나는 괜히 고민이 됐다. 신성한 곳이라는데 가봐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나는 유독 높은 산에 있는 호수를 좋아했다. 하지만 다시 올라가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결국, 나중에 또 올 기회가 있겠지 하며 마음을 접었다.
다시 오면 반겨주는 히말라야 신
투르추Thurchu(4,035m)는 봄에 폭설로 걸음을 멈췄던 곳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코앞의 나문 라를 두고 탈출을 감행했다. 아무도 길을 몰랐고, 물과 먹을 것 없이 17시간 30분을 걸었다. 우리는 그날 3,000m를 내려가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엔 나문 라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막상 와서 보니 길을 알았어도 넘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오히려 무리해서 탈출한 게 다행이지 싶다.
저녁마다 눈이나 비가 내렸다. 아침에 구름이 걷히면서 송곳니처럼 생긴 봉우리가 드러났다. 그 아래가 나문 라였다. 저곳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길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험해 보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틀 만에 나문 라를 넘었다. 여기서 하산은 고작 이틀 거리였다. 고소 적응이 완벽하게 됐다면 나흘 만에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고소 적응을 포함하더라도 일주일이면 가능한 곳이니 그리 어려운 트레킹은 아니다.
나문 라에서 바라보는 마나슬루는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보던 것보다 압도적이었다. |
푸르주데우랄리Furjudewrali(4,385m)에서 보는 나문 라와 마나슬루는 황홀했다. 벅찬 마음으로 산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칭찬했다. 다시 와서 기특하다고. 히말라야 신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도 다시 오면 꼭 이렇게 반겨주었다. 히말라야에서 실패한 곳을 다시 찾았을 때마다 그랬다.
푸르주데우랄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쿠디는 계곡을 따라서, 시클레스는 능선 사면으로 이어졌다. 지난번에는 시클레스로 올라왔기에 이번에는 쿠디로 향했다. 이 길은 두드 포카리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다니는 길이라 1시간 간격으로 대피소가 있었다.
대피소 주변은 온통 랄리구라스(네팔 국화) 숲이었다. 4~5월이면 근사할 듯했다. 다람살라Daramshala 역시 대피소가 있었다. 넓은 초지에 맑은 물이 있고 불도 피울 수 있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하는데 포터들은 더 내려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야영을 선호하지 않았다.
몇 시간을 내려갔는데도 물이 없었다. 지금까지 물을 자주 만났기에 설마 물이 없을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7시간 동안 걷다가 팔마 카르카Palma Kharka(3,141m)에서 30분을 더 내려갔다. 숲은 우거졌지만 계곡은 말라 있었다.
티망에서 단페 단다까지 고도 1,600m를 올렸다. 한국에서 구매한 중저가 텐트를사용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
그나마 좁고 지저분한 대피소 옆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이 있었다. 먼저 도착한 데브가 물통을 대놓고 주변을 살피러 갔다. 우리는 안개에 젖은 풀밭에 텐트를 쳤다. 포터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나는 텐트에 앉아 일기를 썼다. 고생 뒤에 찾아오는 안락함은 아무리 사소해도 달콤했다.
밤새 내린 이슬로 텐트가 축축했다. 저녁에 불려 놓은 누룽지로 아침을 먹었다. 나는 혼자여서 요리사를 따로 고용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점심에는 혼자 라면이나 국수를 끓여 먹고, 저녁은 포터들이 먹는 밥을 같이 먹었다. 반찬 하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히말라야 곳곳을 걸을 수 있음이 좋았다.
하산하는 동안 신성한 느낌의 랄리구라스 숲을 지나고 방목하는 염소들을 만났다. 이곳은 능선 어디에서나 안나푸르나, 페리 히말, 마나슬루가 보였다. 마을에서는 눈 덮인 히말라야가 앞산이자 뒷산이었다. 언제나 히말라야를 보며 사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투르추는 봄에 폭설로 걸음을 멈췄던 곳이었다. 그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문라를 두고 탈출을 감행했다. |
간 포카라Ghan Pokhara는 큰 마을이었다. 구룽족 마을로 유명한 곳이라 궁금했는데 사진에서 보던 모습과 달랐다. 전통 양식의 지붕이 대부분 양철지붕으로 바뀌었다. 요새 네팔은 어디를 가나 지붕이 똑같았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축제를 위한 거대한 그네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단오 때 만드는 그네와 비슷했다.
베시사하르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데도 굳이 쿠디까지 3시간 동안 걸어서 내려갔다. 그리고 쿠디에서 지프를 빌려 베시사하르까지 갔다. 산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다 내려오니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문명의 이기 앞에서 묘한 위안을 받았다. 나는 맥주 한 병 시켜 놓고 다시 지도를 펼쳤다. 자, 이제 어디로 가볼까?
트레킹 정보* 일반적인 코스 시클레스(1,980m)-타사 카르카(2,368m)-싱겐게 다람살라(3,450m)-코리(3,888m)-팔네(4,212m)-투르추(4,035m)-나문 라(4,850m)-티망(2,750m) 총 60km
* 트레킹 기간은 짧게는 4일, 길게는 7~8일이면 되지만 이동을 고려해 추가로 5~6일이 필요하다.
* 시작과 끝 지점을 제외하고 전 일정 야영을 해야 한다.* 능선으로 진행할 경우 물을 만나기 어려우므로 사전 파악이 필요하다.
* 안나푸르나의 대중적인 곳과 연결되어 얼마든지 코스 연장이 가능하다.
* 안나푸르나 3패스 트레킹은 3주 이상의 시간과 일부 구간 야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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