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추석에 되새기는 ‘오래된 미래’
이병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사장 |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농경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수확이고, 수확제는 농경사회 최대의 축제였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는 수확에 감사하고 이를 즐기는 전통축제가 남아있다. 농경사회의 유산이다.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대표적이다. 미국으로 이주한 초창기에 많은 청교도인들이 추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농사짓기도 쉽지 않았던 척박한 땅을 일구고 추수를 마친 이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농작물과 칠면조를 요리해 먹은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다. 중국의 중추절, 일본의 오봉, 독일의 에른테단크페스트(Erntedankfest) 등 이름은 다르지만 저마다 추수한 농작물을 나누어먹으며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마친 것을 감사하는 축제를 열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각국의 수확제는 크게 간소화되었고, 우리의 추석 역시 마찬가지다. 풍년의 기쁨을 노래하는 농악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고, 마을의 단합을 위해 씨름을 하거나 보름달 아래서 강강술래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과거와 달리 먹거리는 지나치리만큼 풍족해져서 송편, 약식 등은 추석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추석이 되면 여전히 대다수 국민들이 고향을 찾아 가족을 만나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이웃끼리 작은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추석이 단순한 ‘연휴’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다.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저서 ‘오래된 미래’를 통해 인도와 티베트 접경지역에 위치한 라다크의 오랜 전통이 개발주의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이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를 역설한 바 있다. 다른 농경사회와 마찬가지로 라다크는 가족 구성원이나 지역 주민들 사이의 연대를 통해 공동작업으로 농업을 일구어왔다. 라다크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본 저자는 “함께 일을 하러 모일 때면 집안에는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다”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른바 글로벌 경제체제에 편입되면서 라다크 지역의 인간관계에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라다크 프로젝트’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어 생태친화적 개발과 공동체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의 공존을 모색한다. 무작정 과거로 회귀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을 지키되 시대와 지역에 알맞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농업이야말로 인류의 오래된 미래다. 협력, 공존, 상생 등 우리가 지켜야 할, 그러나 놓치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농업에서 찾을 수 있다.
올해는 봄철 한파에 폭염까지 겹쳐 생산농가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은 한 해였다. 작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추석을 앞두고 일부 농산물 가격이 오르는 양상도 나타난다. 그러나 추석의 진정한 의미는 농작물의 질이나 양, 가격에 있지 않다. 거창한 음식이나 화려한 선물을 주고받아야 추석을 제대로 보내는 것은 아니다. 햅쌀 한 톨에도, 대추 한 알에도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추석의 정신이다. 이번 추석을 계기로 우리가 추석을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 부르는 진정한 이유를 되새겨보면 좋겠다. 아울러 ‘오래된 미래’ 농업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가치를 어떻게 지속시켜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늘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