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땅과 토마토를 디자인하죠”…농부가 된 디자이너, ‘그래도팜’ 원승현 대표
- ‘땅을 살리는 농장’ 그래도팜 원승현 대표
- 디자이너에서 ‘브랜드 파머’로…“맛이 좋아야 스토리를 만든다”
[리얼푸드=고승희 기자] 농부가 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교도소 생활 같았어요. 쉬는 날도 없고, 노동도 많았어요. 외국인 근로자 같은 느낌도 들더라고요.”
홍익대 미대(프로덕트 디자인)를 졸업하고, 디자이너의 삶을 살던 청년은 아버지의 토마토 농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미래를 만났다.
“브랜드라는 것은 기준점이 명확하고, 내세웠을 때 효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농산물 브랜드는 지역에서 키운다는 것 외에는 알릴 만한 것이 없더라고요. 도전 의식이 생겼어요. 농산물을 브랜드로 만드는 일이 가치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고향으로 돌아간 원승현(37) 그래도팜 대표의 새로운 직업은 ‘브랜드 파머’. 농사를 지으며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만든 직업이다. “농사 짓기에도 바쁜데, 쓸데없는 소리는….” 농사만 짓던 어르신들은 타박도 하지만, 원 대표의 도전은 지금 농업계에 새로운 바람이 되고 있다.
겨우내 늘어졌던 몸을 추스르고 다시 토마토를 심어야 하는 이 무렵은 가장 힘든 때라고 한다. “운동도 쉬었다가 다시 해야 할 때, 적응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렇게 5년차에 접어들었다. 아버지의 농장에서 함께 한 시간동안 그래도팜의 토마토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이름있는 셰프와 입맛 까다로운 소비자들이 먼저 찾는다. 최근 ‘토마토 밭에서 꿈을 짓다’를 출간하고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원승현 대표를 만나 그래도팜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디자이너 출신 그래도팜의 원승현 대표는 ‘브랜드 파머’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농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
▶ 유기농 30여년…‘땅을 살리는 농장’ 그래도팜=1983년, ‘유기농’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시절. 원승현 대표의 아버지인 원건희 고문은 유기농을 시작했다. 농약을 치고 나면 몸이 아팠던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동안 원 고문은 땅을 되살리는 데에 무수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땅을 되살리고, 훼손 없이 농사를 지어야 지속가능하게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철학이셨어요.”
현재 그래도팜의 1800평 토마토 농장에서 퇴비장은 170평을 차지한다. 농장의 10분의 1가량을 자연 퇴비장으로 쓴다. 이 공간을 생산장으로 쓴다면 수익은 높아졌겠지만, 그래도팜은 타협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땅을 남기는 것은 부채 가득한 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라는 원 고문의 철학은 꾸준히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이었다.
농장에선 참나무 부산물인 수피와 앉은뱅이 밀, 미생물을 투입해 숙성 발효한 퇴비로 땅을 살렸다. “한반도는 지질학적으로 봤을 때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땅이에요. 그래서 남아있는 유기물이 거의 없어요. 농사를 짓기엔 너무나 척박한 땅이죠. 호주, 일본의 유기물 함량이 4%대라면 우리나라 토양의 유기물 함량은 2% 내외예요. 보통 농사가 잘 되기 위해선 3.5% 이상이 돼야 하거든요.” 1990년대 초반 농장의 유기물 함량은 1.8%대. 현재는 4.3%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1%가 올라가는 데에 1000년의 시간이 걸린다는데, 30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땅을 되살리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원 대표는 “일 년에 120톤 정도 되는 퇴비를 농장에 붓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해진 땅에서 자란 유기농산물은 관행농법으로 자란 농산물보다 건강하고, 안전하다고 홍보된다. 원 대표는 그러나 유기농산물의 강점은 ‘맛‘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 유기농산물 이미지는요. 못생기고 맛없고 작고 볼품없지만 건강에 좋은 농산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생산자들은 우리 유기농산물을 먹어달라고 해요. 소비자들도 그렇다고 하니 먹어보려고 하는데 가끔은 관행농법으로 재배된 농산물보다 안전하지도 않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그런데 사실 유기농의 강점은 건강도 안전도 아니고, 맛이에요. 유전자의 차이로 사람들의 얼굴이 저마다 다르듯이 농산물도 어떤 땅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거든요.”
▶ 브랜드 파머의 시작…“품질이 보장돼야 스토리가 만들어진다”=원 대표가 농장의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래도팜 토마토에 대한 자부심이 바탕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때 아버지한테 기왕이면 아들이 좋아하는 농산물을 재배하지 왜 맛도 없는 토마토 농사를 짓냐고 말한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웃으면서 한 번 먹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외식업 브랜드나 셰프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래도팜 토마토의 품질은 증명됐다. 원 대표는 그래도팜의 토마토는 우연히 발견한 ‘맛있는 토마토’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지난 수십년간 일궈온 땅의 기록”이자 “타협하지 않고 지켜온 결실”이라고 말했다.
“고향에 돌아와 브랜드를 만들고 스토리텔링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버지가 쌓아놓은 품질이 보장됐기 때문이었어요. 요즘 농촌에선 스토리텔링을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특이한 농장 이름을 만들고 스토리를 담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죠. 하지만 스토리를 만들기 전에 제품력을 높이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먼저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니까요.”
원 대표는 아버지가 지난 30년 흔들림 없이 지켜온 가치를 담아 농장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래도팜’이라는 이름엔 농부의 자부심과 고집이 담겼다. 그는 “고집스럽게 뭔가를 하다 보면 그것이 차별화의 포인트”라며 “제품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브랜드화시켜 봐야 허공에 쏟아지는 수많은 브랜드와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특별한 홍보가 없어도 소비자들은 ‘그래도팜’의 ‘기토’(그래도팜 토마토 브랜드)를 기가 막히게 찾아온다. 일 년 농사에서 5600가구가 주문을 한다. 한 해 생산량인 40톤이 남김없이 소비자들의 식탁에 오른다. ‘기토’는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 ‘기토’를 먹어본 사람들은 이름에 대해서도 저마다의 해석을 쏟아낸다. ‘기똥차게 맛있어서’, ‘맛이 기가 막혀서’, ‘기적같은 맛’이라고 고객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때때로 ‘기다려서 먹는 토마토’라고 부르는 소비자들도 있다. 심지어 새로운 품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는 것은 ‘기토’의 브랜드 역시 ‘지속가능성’을 담보했다는 의미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에 우리 농장의 미래가 있어요. 지금 생산 중인 우리 토마토의 씨앗을 채취해 유지하려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토마토가 내병성 위주로만 발전하면 맛이 없어져요. 종자 보존을 해야 우리 토마토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생산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근본을 지키면서 품질을 으뜸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어요. 앞으로도 가능하기 위해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씨앗도, 땅도, 사람들의 생각도 지속가능해야 진정한 지속가능성이 이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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